청동릉과 청서릉은 왜 나누어졌을까?

2020-03-19

청조의 황릉 구역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청조가 베이징 입성 전에 산해관 바깥에 건조한 능원 구역이 있고, 그후에 청동릉과 청서릉을 건설하였다.

명조의 경우도 북경 천도 이전  남경에 능원이 있다는 점에서, 건국 초기 선대 능원구역과 이후 능원 구역이 나누어지는 것은 이해가 되는 점이 있지만,  청조의 경우는 왜 청동릉과 청서릉이 나누어진 것일까?

옹정초년 (雍正), 옹정황제(청조 5대황제) 는 자신의 사후에 몸을 누일 곳으로  준화 경내의  청동릉(清东陵) 구봉조양산(九凤朝阳山)을 확정하고, 대량의 건축자재를 운송했다. 옹정7년(1729), 옹정황제는 그곳이 "규모는 비록 크나 형국이 완전치 못하며, 암동 속에 흙과 자갈이 있다"는 구실로,  하북성 이현 태녕산(易县泰宁山) 아래에 새로운 자리를 선정했으며, 그곳에 자신의 능침 태릉(泰陵)을 건설했다.

옹정제 재위시기,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고, 개혁을 단행하는 등 근면했지만,  많은 이들의 미움을 샀고,  나쁜 소문도 떠돌았다고 한다. 민간 전설에서는 옹정이  부친 강희황제의 유서를 고쳐서 즉위하였으며, 사후에 감히 부친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청서릉 외에 다른 곳에 무덤을 건설하였으며, 이런 탓에 동릉(东陵)과 서릉(西陵)이 나눠지게 되었다고 한다.

옹정은 강희제의 수 많은 아들 중에서  4째 아들이었으며, 강희 48년(1709)에 옹친왕 (雍亲王)에 봉해졌다. 당시 황자들 사이에선 자리 차지를 위해 서로청 의 견재가 심했으며, 옹정은 이 시기 오히려  조정을 떠나 암암리에 황권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강희61년(1722年) 에 강희황제가 세상을 뜨고, 옹정은  안팎으로 도움을 받은 채,    "네째에게 황위를 계승하라' 는 강희황제의 유서를 선언함으로써,  황위에 올라 년호를 옹정(雍正)으로 정했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옹정은 즉위 후에, 신임하던 이친왕(怡亲王)을 보내 자신의 만년길지를 찾도록 하였으며, 본래 청동릉 지역에서 자리를 찾아 일부 공사를 진행하다가 심각한 결함을 발견하여 버렸다고 한다.

또, 동릉과 서릉의 균형을 위하여, 건륭은 후대에 동-서릉을 순서대로 번갈아 사용하기를 지시했으나, 그후 황제들이 능을 선택할 때  동릉, 서릉을 번갈아 집행하도록 한 선대의 말을 엄격히 따르지는 않았다.

청 동릉 清东陵  황제릉 5곳 :

순치 효릉 ( 孝陵, 顺治 ), 강희 경릉(景陵, 康熙) , 건륭 유릉(裕陵, 乾隆), 함풍 정릉 (定陵, 咸丰) , 동치 혜릉(惠陵, 同治) 。

청 서릉 清西陵 황제릉 4곳 :

옹정 태릉 (泰陵, 雍正皇帝),  가경 창릉 (昌陵,  嘉庆皇帝), 도광 모릉(慕陵, 道光皇帝),  광성 숭릉(崇陵, 光绪皇帝) 。

(아이부 나는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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