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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황궁 자금성

  • 입력 2015-04-28 07:40:20 | 조회 2069 | 추천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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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세계 최대황궁-자금성)

1924년 서북군벌 풍옥상(馮玉祥)이 포문으로 자금성을 겨누어 청(淸)나라 마지막 황제 아이신죠로 부의(愛新覺羅 溥儀)를 궁궐에서 쫓는다. 1908년, 3살에 황위에 올라 종묘사직을 이어가기는 고사하고 선조가 물려준 궁궐마저 내주어야 했던 부의, 망국의 황제,중국 봉건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황권을 상징하는 자금성을 떠났다. 부의를 축출한 뒤 중국 광활환 대지에는 공화제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자금성은 15세기초 명(明)나라 영락(永樂)황제가 베이징에 도읍을 옮기며 건축했다. 부지면적 72만평방미터, 방 8700여채로 구성된 고금동서 가장 웅위로운 이 궁궐은 1644년 섬서(陝西)의 농민봉기군 수령 이자성(李自成)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잠간 머문뒤 275여년간 줄곧 청나라 궁궐로 사용되었다.

100만 인부가 14년간 건축한 자금성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으로 자금성의 남쪽성곽에 있다. 1406년부터 시작해 14년동안 약 10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건축한 자금성은 남북길이가 960미터, 동서너비가 750미터다. 자금성은 네면이 두께가 0.72미터, 높이가 약 10미터인 주홍색 성벽으로 둘러싸여있다. 남쪽의 천안문외에 성곽의 북쪽, 동쪽, 서쪽켠에 각기 신무문(神武門), 동화문(東華門), 서화문(西華門)이라고 부르는 성문이 있다.

공중에서 보면 사각모양인 자금성은 남북 중추선을 주축으로 동쪽과 서쪽의 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칭 구도를 이루고 있다.

자금성은 외조(外朝)와 내정(內庭)으로 나뉘여져 있다.

외조는 황제가 정무를 집행하던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남문으로 자금성에 입궁하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인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다.

외조의 주건물은 태화전(太和殿)과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다. 태화전은 황제의 공식 집무실이고 중화전은 황제가 하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하던 곳, 보화전은 황제의 도서관이고 연회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후기에는 과거시험의 제일 높은 단계인 전시(殿試)를 이곳에서 치렀다고 한다.

(사진설명: 자금성의 태화전)

(사진설명: 자금성의 중화전)

태화전은 외조의 중심이며 자금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TV에서 청나라 사극을 보면 문무대신들이 옥좌에 앉은 황제를 향해 "만세"를 웨치며 조배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 곳이 태화전이다.

역사적으로 태화전은 세번 화재를 당했다. 현존한 건물은 1695년 청나라 강희(康熙)황제 때 세운 것이다. 태화전은 3개 단계로 쌓인 기단우에 건설되었는데 기단을 포함한 건물 총 높이는 37.44미터, 면적은 2377평방미터다. 태화전은 일흔두개 나무기둥이 노란색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이곳은 명청시기 황권을 상징한 곳답게 용조각이 특히 많다.

(사진설명: 황성과 사람들)

명청시기 황제는 즉위식이나 결혼식을 진행할 때, 칙령을 반포하거나 외국사신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때에도 태화전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내정은 건청궁(乾淸宮)과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내정의 중심건물은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 초기까지 황제의 침실로 사용된 건청궁이다. 청나라 옹정(雍正)황제부터 시작해 그후 황제들은 양심전(養心殿)에 거주했다.   

 

(사진설명: 자금성의 건청궁)

옹정황제 이후 건청궁은 황제가 고위대신이나 외국 왕실의 손님을 맞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내부 모습은 대체로 태화전과 비슷한데 금칠을 한 병풍과 옥좌를 비롯해 천장과 기둥 그리고 여러가지 기물들이 모두 화려함을 자랑한다.

건청궁 옥좌 바로 뒤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란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청나라 초기 순치(順治) 황제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건청궁 입구에 걸린 '건청궁(乾淸宮)'이란 현판도 순치황제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다.

교태전은 청나라때 옥새를 보관해두던 곳, 곤녕궁은 명나라와 청나라 초기 황후가 거처하던 곳이였다. 곤녕궁 이북에는 황실의 놀이터인 1200평방미터의 어화원(御花圓)이 있다.

그럼 자금성처럼 방대한 공사에 드는 대형 석재와 목재는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운반되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자금성 건축에 사용된 돌들은 베이징 외곽의 방산(房山)에서 채석했다. 겨울철 인부 2만여명이 동원되어 원통형의 거대한 돌들을 날랐고 기술자들은 언 땅에 물을 뿌려 빙판길을 마련했다. 그러면 자금성 건설장까지 수천마리의 말들이 빙판에서 돌을 끌어 날랐다. 건축용 나무들은 사천(四川) 지역에서 벌목해왔다고 하는데 운반하기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인부들은 폭우가 쏟아져 나무가 강쪽으로 떠내려 가기 만을 기다렸으며 나무가 강에 떠내려 오면 배사공들은 물길을 이용해 베이징까지 운반했다고 전해진다.

한 여인의 원한 맺힌 <진비우물>

    

(사진설명: 자금성의 구도)

자금성 녕자궁(寧慈宮) 북쪽에 위치한 안정문(安貞門)을 지나면 <진비(珍妃)우물>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다.

청나라 말 광서(光緖)황제의 후궁인 진비가 여기서 익사해 지어진 이름이다. 1900년 베이징을 침공한 8국연합군이 자금성에 닿게 되자 자희(慈喜)태후와 광서황제는 부랴부랴 궁궐을 이탈하는데 탈궁에 앞서 자희태후는 진비를 죽인다.

진비는 천하절색이었다고 한다. 자희태후는 진비를 죽이는 명분을 "데리고 떠나자니 짐이 될 것이고 두고 떠나자니 8국연합군에 욕볼것 같다."고 내세웠으나 기실 1898년 진비가 무술변법을 지지할 때부터 그녀는 이미 자희태후의 눈에 든 가시로 되었다.

1898년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등 청나라 말기 자본주의개량파 즉 유신파들은 서방을 따라배워 봉건체제에 대한 정치개혁을 실시할것을 광서황제에게 제의하며 무술변법을 일으킨다. 보수세력의 대표인물이고 정치개혁을 극력 반대한 자희태후의 탄압으로 변법은 결국 실패하고 마는데 변법을 지지한 광서황제는 억류되고 진비도 연루되어 감금된다. 진비는 광서황제를 도와 유신파 성원을 확대시켰다고 전해진다.

진비는 2년간 감금된 뒤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사진설명: 자금성의 처마)

고궁박물관으로 개칭된 자금성

1924년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났고 이어 1925년 10월 10일에 자금성은 고궁박물관으로 개칭되었으며 대외에 개방되었다. 고궁박물관은1961년 국무원으로 부터 제1진 "전국중점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1987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고궁박물관에는 도자기와 청동기, 진주보석, 서화작품 등 다양한 종류의 진귀한 문물이 도합 105만 2653점이 소장되어 있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주석은 천안문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만천하에 선포, 600년간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 24명이 천하를 호령해오던 이곳 자금성은 드디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진설명: 자금성의 교태전)

(사진설명: 천안문)

 (사진설명: 자금성 성벽)

 (사진설명: 자금성의 <오문>현판)

 (사진설명: 자금성의 태화문) 

(사진설명: 태화전 기단에 그려진 용무늬 도안)

 (사진설명: 자금성의 옥좌)

 

(사진설명: 대외에 개방된 자금성)

 (사진설명: 자금성의 정교한 건축)

(사진설명: 자금성의 어화원 나무)

(사진설명: 자금성의 어화원 건물)

(사진설명: 자금성의 어화원 코끼리)

<사진설명: 자금성의 북문-신무문(神武門) 건너로 보이는 경산(景山)>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5-04-28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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