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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100년 전 정양문 개조공사 이야기

  • 입력 2016-04-21 06:47:07 | 조회 972 | 추천 65
  • 출처 北京日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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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통정체는 도시 시민들의 골치거리중 하나다. 사실 베이징은 이미 100년전에도 교통정체로 골치아픈 곳이 있었는 데, 바로 정양문(正阳门)이었다. (사진출처 : 베이징 정양문관리소)

 

△ 청대 건륭시기 경성전도상 정양문 지도

 

정양문(正阳门)은 전문(前门)이라고도 부르며, 베이징 내성 아홉문(内城九门)중 남쪽벽의 정중앙문이다. 각 성문중, 전문의 규모가 가장 컸으며, 성루(城楼, 성벽 입구문 건축), 전루(箭楼, 성벽앞 활을 쏘는 건축), 옹성(瓮城, 성루와 전루를 연결하는 네모형 성벽)으로 조성되었었다. 또한 전루 양측에 관제묘(关帝庙), 관음묘(观音庙)와 전루 앞쪽에 정양교(正阳桥)와 오패루(五牌楼)가 있었다.

제국시대, 정양문의 정문은 단지 황제가 순시를 나가거나 천단(天坛)과 선농단(先农坛)에 제사 지내러 갈 때만 문을 열었다.  평상시 마차나, 행인들은 20미터 길이의 옹성 동굴문(瓮城门洞)을 통과하여, 양측의 갑문(闸门)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성 동굴문내의 행인, 가축, 차량들이 종일 붐볐으며, 악취가 가득했다.

 

△ 전문 개조직전, 성루와 전루를 연결하는 옹성이 존재하여, 전문 기차역의 열차는 성벽 근처까지만 닿을 수 있었으며, 타고 내리는 승객들은 옹성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교통은 정체되었다. 사진은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촬영, 옹성 왼쪽편이 전루, 오른쪽이 성벽과 전루건축이다.
 

 

 

△ 전루 동측면에 월대를 공사하고 있다.

 

1901년, 경봉철도(京奉)와 경한철도(京汉)가 정양문 성벽 근처까지 닿았다. 이때부터, 베이징 내외성에 출입하려면 정양문을 통과해야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오는 여객들 역시 문을 통과해야만 내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왕래하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전문지구의 상업은 날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도 번화한 대책란을 제외하고도 당시 정양문 성벽에는 작은 노점상이 셀수 없이 들어섰다. 이런 이유로 성을 나서고, 성을 들어오고, 물건을 팔고, 물건을 사고, 기차에서 내리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정양문은 발 디딜틈 조차 없었으며, 어떤 때는 심야까지 정체가 계속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경도시정공소(京都市政公所)' 시정독반을 맡은 주계검(朱启钤)은 전문지역 동서 역을 관통시켜, 인파의 분산을 해결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는 반복적인 실지조사와 비교를 거쳐, 최종적으로 '옹성의 철거'를 결정했다.

1915년, 주계검은 독일인 건축가 로트케젤(Curt Rothkegel, 1876~1946)을 초빙하여 전문 개조설계를 확정했다. 로트케젤은 20세기초에 중국에 와서, 청나라 말기 입헌준비시 자정원 건물(资政院大厦), 민국후기 북양정부의 국회의장(国会议场) 설계건축에 참여했으며, 경험이 풍부하고 당시 건축계에서 지위가 높은 편이었다.



 

△ 공사인부들이 서측 옹성을 철거하여 나온 흙을 작은 화물기차에 싣고 있다。


△ 1915년 6월 16일, 내무총장 주계검(가운데)이 비오는 날씨에도 전문개조공사 개공의식을 진행했다.

 

당시 제작한 정양문 옹성 개조방안 모형을 통해 보면, 옹성 철거후 정양문 성루 양측 성벽에 문을 각각 두 곳 뚫고, 길을 넓히며, 길가와 전루 앞에는 가로수를 심었다. 지금도 전루를 보면 당시 로트케젤의 설계를 아직까지 엿볼 수 있다. 그는 전루 동서면에 백색 월대를 추가건축하고, 북면에는 전루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두 개 만들었으며, 밋밋했던 건물의 창문에는 백색의 창문 테두리를 추가했다.

로트케젤의 설계는 전루를 하나의 독립적인 건축으로 변신시키는데 성공적이었다. 개조후의 전루는 더욱 정교해보였다. 하지만 당시 로트케젤의 중서융합의 설계는 적지않은 조롱을 받았으며, 전문의 개조공정 역시 적지않은 저항을 받았다.

 

전문 개조시 가장 큰 불만세력은 하포항(荷包巷, 옹성 성벽바깥 지역)의 상인들이었다. 개조공사는 그들의 생업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은 당연히 순수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상인들은 전문의 철거개조가 베이징의 풍수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반드시 액운이 닥칠 것이라고 소문내고 다녔으며, 적지 않은 철거대상 상가들이 여러차례 정부에 청원을 했다. 최종적으로 시정공소에서는 어쩔수 없이 전문바깥에 서양식 백화상점을 새로 짓고 그들에게 저렴하게 임대하겠다고 결정했다. 이로서 한바탕 난관이 잠잠해졌다.

 

1915년 6월 16일, 주계검은 비를 무릅쓰고 전문개조공사 개공의식을 진행했다. 그는 당시 대통령 원세개(袁世凯)가 수여한 '특제 은 괭이'를 들고, 성벽의 첫 벽돌을 부수었다. 이 은제 곡갱이는 무게가 3근 남짓으로 윗면에 '내무총장 주계검이 정양문 개조에 대한 대통령을 명을 받아, 1915년 6월 16일, 이 도구를 사용하여 첫 벽돌을 철거하니 교통이 원활케 될 것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 대통령의 권위를 활용하니, 저항세력도 점차 멎어들었으며, 반년후에 전문 개조공정이 완공되었다.

 

 

△ 개공의식후에 인부들이 철거공사를 시작하고 있다.



 

△ 정양문 좌우 성벽에 두개의 문을 뚫어, 경봉철로의 기차가 성을 통과할 수 있었다. 사진속 기차는 당시 철거로 나온 벽돌과 흙을 운송하고 있다.

 

 

△ 1915년 12월 18일, 정양문 개조공사가 완공되었으며, 경축의식을 진행했다. 전루에 전등을 설치했다. 




△ 1915년 정양문 개조공사 완공, 성루와 전루를 연결한 옹성을 철거하고 정체구간을 큰 길로 뚫었다. 독일 설계사가 전루를 백색의 한백옥 난간과 창틀로 설계했다. 사진은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촬영, 사진 중간은 전문 기차역이며, 사진왼쪽 성벽에 두개의 동굴형 문이 뚫렸다, 오른족 건물이 개조된 전루건축이다.

 

 

개조후의 정양문은 시민들의 교통에 편리를 주었으며, 주변 상가와 두 철도로 인해 정체되었던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게다가 도시환경이 미화되었다. 즉, 용도를 변경하엿으나 풍모를 유지했다.

백년이 지난 지금, 당시 주계검이 진행한 전문개조공사는 도시 리뉴얼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진출처 : 베이징 정양문관리소)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6-04-21 09: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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