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시 관광발전위원회 한글공식사이트
아이디/비번찾기

베이징관광국 공식사이트

자금성 양심전, 8대 황제의 침궁 - 양심전 보수에 즈음하여

목록

 

자금성 양심전 : 8대 천자의 침궁 

△ 양심전 내부

 

자금성 양심전(养心殿) 건축은 폐쇄형 원락으로, 메인건축은 "工"자형이며 전전(前殿), 후전(后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전의 너비와 세로길이는 각 세칸으로 황색유리기와 헐산식 지붕이며, 앞쪽으로 6칸크기의 포하(抱厦, 테라스식 중국건축형태)가 붙어 있다. 명간(明间)에 보좌가 놓여있고, 위쪽에 옹정황제(雍正) 친필의 '中正仁和(중정인화)' 편액이 걸려있다.

동난각(东暖阁)은 자안태후(慈安太后), 자희태후(慈禧太后)가 수렴청정(垂帘听政)하던 곳이었다. 서난각(西暖阁)에는 여러개 방이 붙어 있는데, 근정친현(勤政亲贤), 삼희당(三希堂), 무권재(无倦斋), 장춘서옥(长春书屋), 소불당(小佛堂), 매오(梅坞) 등이 있다. 후전 동측은 '체순당(体顺堂)', 서측은 '연희당(燕禧堂)'으로 황제와 후비가 거주하던 침궁이었다.

 

△ 양심전 내부의 '中正仁和(정중인화)' 편액.

 

2015년 현재, 양심전은 백년만에 처음으로 대대적은 보수를 진행하고 있으며, 2020년경 완공될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양심전의 개방면적은 60% 정도가 될 것이며, 지금까지 창문너머로 바라보던 관람방식에서, 양심전 내부로 직접 들어가 볼 수 있게 된다.

청나라 궁궐 사극을 자주 보았거나, 역사를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양심전의 지위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알 수 있다. 양심전은 곧 황제의 침궁이었으며, 봉건시대 황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 1922년-1924년 사이, 양심전 외부 모습。

△ 양심전 전전 내부 명간(明间), 1900년 촬영.

 

양심전의 위치는 자금성 내정구역, 건청궁(乾清宫) 서측으로, 명나라 가정연간(嘉靖)에 처음 지어졌다. 초기에 이곳은 황제의 침궁은 아니었다. 청 강희시기(康熙)에는, 내무부가 이곳에 궁궐용품 제작을 위한 전문 공방을 여러개 두었기에, 양심처조판처(养心殿造办处)라고 불렸다.

강희 61년(康熙 1722), 강희황제가 별세하고, 옹정황제(雍正)가 즉위하였으나 부친의 침궁이었던 건청궁에 들어가 살지 않았으며, 서측 존의문(遵义门) 내 소위 여막(苫次, 부친의 빈소를 지키는 초가움막)으로 잠시 사용된 양심전이 황제의 침궁으로 되었다.

그때 이후 역대 황제들이 양심전을 침궁으로 사용하였는데, 옹정황제 이후 1924년 11월 마지막황제 부의(溥仪)가 궁을 떠날 때까지 2백년 넘는 기간 동안 줄곧 사용되었다.



△ 태감 한 명이 양심전 전전 보하에 서있다. 촬영 1900년。

△ 1900년 양심전 동난각.

 

사실 양심전은 황제의 일상생활 침전일뿐만 아니라, 자금성 중 가장 중요한 공무장소이기도 했다. 매일 아침 황제가 아침을 먹고, 양심전 전전에서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했는데, 이는 일상적인 조례인 '상조(常朝,上朝)' 였다. 황제는 전전 서측의 '근정친현(勤政亲贤)'에서 회의를 갖거나 단독으로 관원을 만나거나 또는 장주(章奏)를 검토했다.

' 근정친현' 남측창문 바깥에는 외부공간과 단절을 위해 벽이 세워져 있으며, 당시 황제가 단독으로 관원을 만날때는 내감(内监, 환관) 역시 자리를 피했을 정도로, 무척이나 비밀스런 장소였다.

언급할 만한 것은 양심전의 위치와 옹정년간에 설립된 군기처(军机处)가 겨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황제와 대신들이 군사적인 대사를 논의하기에 편리했으며, 이는 황제가 이곳을 거주지로 선택한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 부의(溥仪)가 꽃이 만발한 양심전 앞에 서있다. 1922년-1924년 사이 촬영。

△ 완용(婉容, 부의의 아내로 마지막 황후)이 양심전 앞에서 사진기를 들고 있다. 1922년-1924년 사이 촬영。

 

공무가 끝나면, 양점전의 강력한 생활적 기능이 발휘된다. 이곳에는 황제가 고적 서화를 열람하고 글과 시를 지을 수 있는 서재인 삼희당(三希堂)이 있으며, 아침저녁 경건히 예불을 드릴수 있는 비밀스런 불당이 있으며, 심지어 제후 전용 서비스인 어선방(御膳房)이 있어 제철음식을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양전전 전정은 공무용, 후전은 거주성 기능으로 구성되어, 황제의 공사 생활을 극도로 편리하게 했음을 알수 있다. 

 

자금성 내에서 황제가 걸어다니는 핵심구로서, 양심전은 일찍이 중국역사에 영향을 끼친 중대한 사건이 여러차례 발생했다.

1839년, 도광 황제(道光)가 이곳에서 임칙서(林则徐)와 함께 금서아편(禁除鸦片)의 방안을 기획하였다. 태평천국 전쟁(太平天国战争) 후기, 양궁 태후가 이곳에서 군기 대신들과 밤낯으로 병력배치와 태평군 토벌책략을 짰으며, 최종적으로 승전보를 얻었다. 

청나라 말기에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때, 상당부분이 이미 양심전에서 검토 승락된 것들이다. 1912년 2월 12일, 선통황제 부의(宣统皇帝溥仪)가 이곳에서 청나라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고, <퇴위조서(退位诏书)>를 발표함으로, 268년간의 청 왕조 통치 멸망을 알렸다. 

그외에도, 역사상 순치(顺治), 건륭(乾隆), 동치(同治) 3대 황제가 이곳 양심전 용상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 양심전 후전 침궁. 1922년-1924년 사이 촬영。


 

△ 양심전 수안실(随安室), 1900년 촬영。

 

비록 1860년 10월, 자금성이 사진술과 인연을 맺었으나, 그 이후 1900년까지 40년간, 사진술은 자금성을 담장 안으로 한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팔국연합군이 황궁을 점유한 기간에 이르러, 자금성의 사진자료가 대량으로 남았다.  

이글에 사용된 사진은 양심전의 옛 사진으로 1900년과 1922-1924년에 촬영된 것이다.  이 두 시기기 촬영한 자금성 사진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사진을 통해 백년전의 모습을 어렵풋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원문 및 사진: 고궁출판사 궁정역사편집실)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6-04-25 10:10:33   

목록

> 한마디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1
로그인 후 이용하여 주십시오
의 견
링 크 블로그나 관련링크 URL을 입력하여 주십시오
(http://포함주소)

> 관련 기사 334

맨위로

개인정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