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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화원 1부 - 맑은 물결에서 금수강산이

  • 입력 2014-04-14 10:31:39 | 조회 1898 | 추천 171
  • 출처 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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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제1부 맑은 물결에서 금수강산이

 

 머리말: 중국 마지막 황가 원림은 베이징 서북 교외에 있는 이화원이다. 옛날에는 청의원(清漪園)이라고 불렀다. 만수산의 원 명은 옹산, 곤명호는 옹산백이라고 불렀다. 1749년 건륭은 총괄대신 삼화에게 흙을 퍼내 옹산백을 확대하라고 명했다. 그 뒤로 서호라고 불렀다. 그리고 댐을 건설해 경성에 물을 공급했다. 1750년 건륭은 서호를 곤명호라고 개칭하고 옹산을 만수산이라고 고쳤다. 건륭은 또 삼화에게 만수산 남쪽 비탈 원정사 옛터에 대보은연수사를 수건하라 명했다. 어머니의 육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이어 여러 채의 정, 당, 다리 등 부속 건물도 수건하기 시작했다. 건륭은 만수산 곤명호 일대의 건물을 정식으로 청의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후 건륭은 처음 강남으로 남하해 서호의 비경을 본따 혜산원을 수건하고 이름을 화취원이라고 고쳤다. 이어 제2차, 3차 강남에 남하했는데 갈 때 수행인원으로 화공을 데리고 가 서호의 경치를 본따 청의원을 건설했다. 강남 경치를 닮았지만 강남보다 더 아름다운 경치를 만든 것이다. 서호의 비경 외에도 청의원 내에는 전국 각지의 명승지 건물과 경치를 재현해 한 곳에서 세상 경치를 다 둘러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1764년 15년에 걸쳐 청의원이 준공됐다.

    수리공사를 보수하고 사찰을 건축하고 흥이 채 가시지 않아 강남으로 내려가 명승고적을 방문하고 토목공사를 재차 진행한다.

    한없이 펼쳐진 맑은 물결에서 15년의 춘하추동을 거쳐 마침내 금수원림이 출현해 정권의 잘잘못을 논한다. 모든 아름다운사물은 한사람의 흉금에 남아있다.

    베이징 서북교외의 한없이 펼쳐진 습지에는 청나라 건륭연간에 천지개벽의 변화가일어났다.

    건륭14년, 이곳에는 하나의 수리공사를 시작했다.

    베이징교외의 첫번째 저수지와 완정한 수리시스템을 건설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공사의 종료가 다만 다른 한 웅대한 공사의 시작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건륭의 하나하나의 성지에 따라 예전의 습지는 점차 원림의 추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청의원(清漪園)으로 이화원(頤和園)의 전신이다. 이 원림공사는 왜서 논란을 일으켰을까? 그와 사람들이 익숙한 건륭의 강남순시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15년의 춘하추동을 거쳐 수십만명의 인공을 들여 수축한것은 과연 어떠한 금수화원인가?  이번 회에서 특기와 실경을 결합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소실된지 100여년 되는 청의원 승경을 재현시킨다.

    자연은 예술을 육성했다. 건축은 역사를 응고시킨다. 예술은 자연에서 성장하고 역사는 건축에서 유전된다. 세월의 흔적이 사라져가지만 영원한 예술과 예전의 역사는 또다시 재차 빛난다.

    이는 중외에 이름난 원림으로서 베이징성 서북교외에 위치해 자금성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원림안의 이 산은 만수산이라고 부르고 산앞의 이 호수는 곤명호라고 부른다. 이는 중국의 최후의 황가원림인 이화원이다.

    수년전에 이화원은 청의원이라고 불렸다.  이 원림의 산수초목사이와 정자, 누대,누각사이에 도처에서 역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병풍은 예전에 청나라의 건륭황제에 속했다. 또한 바로 건륭황제가 이곳의 산수를 천지개벽의 변화를 일으킨것이다.

    원림이 탄생하기 전의 수백년간 이곳은 한없이 펼쳐진 습지였다. 만수산은 그때 옹산이라고 불렀다. 산앞의 작은 호수는 옹산박이라고 불렀다. 후에 베이징서쪽에 위치한 옹산박을 서호라고 개칭했다. 옹산서호일대는 풍경이 아름답고 화초가 무성하여 사람들은 자주 등산하고 호수를 유람하며 시를 읊고 부를 창작했으며  물고기를 잡고 수렵을 즐겼다.

    기원 1749년, 건륭14년의 음력 11월, 옹산서호일대는 갑자기 흥성거렸다. 수많은 민공들이 여기에 모여 호수밑에 충적된 진흙을 파내고 파낸 흙을 옹산 동쪽기슭으로 운반했다. 이 공사의 책임자는 내무부 총괄대신 산허로서 건륭황제의 성지에 따라 옹산기슭의 서호를 철저하게 치고 준설공사를 진행했으며 확대했다. 당시에 사람들은 이 보통수리공사가 후에 하나의 웅대한 공사의 시작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원나라때부터 시작해   서교 옥천산의 샘물은  경성의 주요수원이었다. 청나라 대내궁정의 식수및 서원태액늪, 자금성, 해자의 물도 모두 옥천산에서 왔다. 강희황제이후 베이징서교에 육속 몇개의 황가원림을 수건해 수원이 상류에서 대량 막혀 수도의 수원이 엄청 부족했다. 심지어 경성에서 대운하로 통하는 조운용수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베이징서쪽에 저수지를 건설해 새로운 수원을 개척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찍 1년전, 건륭은 사람을 파견하여 베이징서쪽일대의 수문지리를 고찰시켰다. 결과 서산일대의 수십갈래 샘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문 건설한 인수 돌수로가 거미줄처럼 산간지역에 널려있었다. 서산과 옥천산의 샘물이 이수로를 통해 서호로 흘러들었다. 원래 옹산서남에 위치한 반달모양의 서호는 준설공사와 확장공사를 거쳐 호수 수면이 옹산 동남쪽까지 확장되었으며 호수도 깊어지고 전체 호수면적도 2배로 확대되고 기세도 예전을 훨씬 초과했다.

    그 당시 서호에 홍수가 범람하여 웬밍웬(圓明園), 창춘웬(暢春園) 등 원림을 수몰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찍이 하나의 댐을 건설했다. 이 댐은 창춘웬서쪽에 위치해 있어 시파(西壩)라고 불렀다. 현재 시파는 원유의 흙댐에서 돌댐으로 바꿨다. 동시에 댐을 보강하고 두텁게 하였으며 댐에다 3개의 수문을 새로 건설했다. 평소에 3개의 수문을 닫아 호수물을 저축한다. 만약 수도에서 물을 사용하면 남쪽수문을 열어 물이 북에서 부터 남으로 경성에 흘러든다. 만약 원림에서 물을 사용하면 동쪽수문을 열어 물을 동으로 흐르게 한다. 만약 특대홍수가 닥치면 북쪽수문을 열어 물을 청하로 흘러보낸다. 옹산기슭의 서호는 실제로 베이징의 첫번째 인공저수지였다. 후에 서호의 서부에 또 하나의 댐을 건설해 원래의 시띠(西堤서쪽댐)가 건륭황제에 의해 뚱띠(東堤동쪽댐)으로 개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이화원에서 볼 수 있는 뚱띠이다.

    동쪽댐기슭의 이 실제소와 비슷한 도금한 동소는 건륭시기에 주조한것이다. 이는 고대 신우가 물을 다스린다는 풍속에서 왔다. 우리나라 고대의 조각품은 대부분 사의였다. 이 동소도 사의의 수법을 사용해 조형이 진짜 같고 표정이 생동하며 눈빛이 반짝이고 실제로 보는것 같다. 풍부하고 섬세한 예술표현력은 당시 주조공예의 수준을 대표하고 있다.

    1750년, 즉 건륭15년의 음력 3월13일, 건륭황제는 준설후의 서호명을 곤명호라고 명명했다. 옹산도 만수산이라고 개명했다. 이 수리공사는 수도용수와 운하조운으로 하여금 이때로 부터 충족한 수원을 있게 하였다. 

    수리공사의 순리로운 준공은 한개 겨울을 바삐 보낸 주관대신 산허와 크고 작은 관리들로 하여금 모두 한숨을 돌리게 하였다. 이날, 건륭황제의 새로운 성지가 도착했다. 그러나 예상밖에 건륭황제는 공사의 마무리를 선포하지 않고 산허에게 만수산 남쪽기슭의 원정사의 유적에다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지으라고 명을 내렸다. 왜서 이곳에다 수리와 무관한 대보은연수사를 건설하라고 했을까? 실로 사람들은 불가사의했다. 이때 산허와 관원들은 건륭황제 마음속에 하나의 웅대한 건축계획이 기실 금방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후에 건륭은 ‘만수산곤명호기’에 이렇게 썼다. 옹산서호공사는 3개의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수리를 보수하고 둘째는 수군을 훈련시키며 셋째는 황태후의 회갑에 즈음하여 서호준설공사의 기회를 이용해 사찰을 수축함으로써 어머니를  축수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이때에야 문득 크게 깨닫게 되었다. 건륭이 당시에 옹산을 만수산으로 개명한것은 바로 어머니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해서였고 독실한 불교신자인 태후를 위해 대보은연수사를 건설하려는 것도 일찍 건륭의 계획가운데 있었다. 대보은연수사공사는 건륭15년에 전면적으로 전개했다. 건륭16년정월, 총괄대신 산허는 만수산대보은연수사 전내의 기발장막, 제물용기배열도를 건륭황제에게 고람시켰다. 건륭은 명령에다 그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대보은연수사공사가 이미 내부인테리어단계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내레이션]

    전하라, 만수산에 담벽시계하나를 만들어라. 성지를 전하라, 만수당, 악수당 침궁윗층에 종 혹은 시계를 설치하라. 성지를 전하라, 만수산 근정전지평보좌석을 조판처에 맡겨서 만들어라. 성지를 전하라, 만수산 청리관에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병풍을 만들고 탁상용 작은 병풍 두개를 만들어라...

    이런 일의 대소를 논하지 않는 지시는 모두 건륭본인에게서 왔다. 종과 시계를 설치하고 병풍을 만드는 세부사항까지 모두 황제가 친히 참견했다. 모든 공사를 모두 건륭이 장악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하나 하나의 성지에 따라 만수산위에 곤명호중의 많은 정자, 대청, 다리,  방갈로 등 부속건축도 육속 건설했다. 보아하니 이번 공사는 사찰하나를 수축하는 것 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였다.

    건륭16년6월, 또 하나의 성지가 전해졌다. 만수산 곤명호일대의  건축물이 건륭에 의해 정식으로 청의원이라고 명명됬다. 이와 동시에 조정에는 청의원관리기구를 설립하고 관인을 발급했다. 이로서 하나의 방대한 원림건설계획이 마침내 완정하게 세인의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건설계획은 조야상하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관외에서 온 청나라 황실은 대자연의 환경을 편애했다. 강희황제로 부터 대규모의 황가원림건설을 시작했다. 베이징 서북교외에 육속 창춘웬, 징이웬, 징밍웬과 웬밍웬 4개의 황가원림을 건설했다. 건륭황제 즉위후 옹정이 증축한 웬밍웬 24경에 대해 한편의 ‘웬밍웬후기’를 썼다. 글에는 웬밍웬을 천지신령한 지역으로 칭송해 제왕들이 노니는 곳으로 이곳 이상 없다고 밝혔다. 

    이 글에서 건륭황제는 천하에 알렸다. 웬밍웬의 수축으로 인력, 물력소모가 거대해 이 후 부터 황가원림을 다시 건설하지 않는 다고 표명함으로서 황제가 근검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했다. 그러나 6년후, 대규모의 청의원건설을 또 시작하였다. 청의원공사를 11년 진행한후에야 건륭황제는 ‘만수산청의원’에서 자기의 변덕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수리건설로 곤명호를 건설하고 마침 호수곁에 만수산이 있었다. 그렇다면 산수의 풍경이 있는데 정자누각의 단장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될까? 

    건륭도 이 해석이 실로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뒷말을 들어보면 더욱 자조같았다. 지금의 청의원은 설마 원림을 재차 건설하는 것이 아닐까? 설마 식언이 아닐까? 비록 수리건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누가 믿어줄까?

    그렇다면 건륭은 과연 왜서 식언을 하면서 까지 청의원을 건설했을까 이 문제는 시종 세인의 호기심과 주목을 불러일으켰다

    건륭16년11월18일 대보은연수사의 제물용기와 깃발 설치가 끝났다 그리고 동시에  태후의 성수를 축하하는 방대한 경축의식을 개최하기 위한 준비도 제때에 완성했다  건륭16년 음력 11월19일은 건륭의 어머니 숭경황태후의 60회갑이었다 이날 건륭은 먼저 자금성 태후의 거처인 자녕궁에서 어머니를 위해 60축수연을 열었다 그다음 황태후는 건륭의 수행하에 서직문으로 베이징성을 나와 처음으로 청의원으로 향했다

    만수산에서 거행한 경축의식은 이 경축의식을 고조에로 끌어올렸다 이때의 청의원은 이미   일정한 규모를 갖추었다 악수당 옥란당과 문창각의 주체공사가 이미 완성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궁정화가 랑스닝이 악수당의 후원유랑에 그림을 제작하고 있었다 만수산 앞뒤의 더욱 많은 원림건축도 시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 당시 청의원의 공사장에서 때로는 한무리 아이들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전당을 둘러싸고  쫓고 쫓기며 질주하는 아이들은 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체중을 이용해 지면을 다지고 있었으며 매인당 몇전의 은화를 보수로 받을 수 있었다

    건륭시기, 국가는 공전에 부유했다. 기재에 따르면 1736년 국고의 은재고량은 3천여만냥에 달해 전 세계 1/4의 재산이 중국에 집중되었다. 조정은 매년 부단한 대소공사를 통해 돈을 유통시켰다. 부를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을뿐만아니라 경제의 발전도 자극했다. 과거의 조대에서 공사의 부역은 무상징집이었고 건축물자도 대부분 강제적으로 할당시켰다. 청나라에 이르러 부역고용제가 보급되기 시작해 장인은 날짜에 따라 보수를 받았고 물자도 관부에서 출자해 구매했다. 황가의 공사는 대우가 더욱 높았다. 내무부 보존서류의 기재에 따르면 청의원건설노동자들은 모두 상세한 노임기준이 있었다. 목공, 미장공, 석공 등 기술노동자들은 매일 은 1돈5푼4리를 주고 막일꾼은 매일 은 8푼을 주었다. 적지 않은 보수는 노동자들의 열의를 북돋아주었다. 만수산 앞산 불향각의 양쪽에는 각기 하나의 종교건축이 있다. 서쪽에 것은 보운각이라고 부르고 동쪽의 것은 전윤장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모두 청의원시기에 남겨놓은 것이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보운각과 윤전장공사에 투자유치방식을 채용해 두개의 건축팀에 도급주었다. 경쟁기제를 황가공사건설에 인입한 것이다.

    2007년, 사람들은 현대의 탐측조사기술로 보운각과 윤전장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다. 결과 양자의 해발고도는 거의 완전히 일치했다. 선진설비가 결핍한 고대에 어떻게 이런 정밀도에 달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수많은 이름도 알수 없는 장인들이 남긴 작품은 불후의 표척처럼 오래 된 신주대지에서 건축과학이 예전에 도달한 고도를 상징하고 있다. 

    보운각 전체는 동을 재료로 건설되었다. 외부조형이나 내부인테리어를 막론하고 ,매하나의 부재도 매우 정교하게  주조했다. 보기에는 목재구조건축과 완전히 같다. 당시의 공사규범사례기재에 따르면 보운각의 예상동사용량과 실제동사용량이 매우 접근해 거의 낭비가 없었다. 당시 전반공사의 관리는 매우 세밀했다. 건축디자인을 책임지는 양식방이 있고 인력과 자재를 정산하는 산방이 있었다. 무릇 인건비가 은 50냥을 초과하거나 자재비가 200냥을 초과하는 것은 황제에게 올려 결재를 받아야 했다.

    보운각 내부의 한쪽벽에는 공사책임자및 각 노동 종류 장인의 이름이 상세하게 새겨져있다. 이는 공사에서 실시한 책임도급과 추궁제도에서 온 것이다. 만약 품질문제가 발생하면 시공일군, 연대책임의 관원들도 모두 책임추궁을 받았다. 건륭36년, 뒷산의 수미선경등 곳에 빗물이 누출되었다.  원래 부착수리공사를 책임진 관원에게 복원비용을  출자하게 하였으며 또한  녹봉을 삭감했다. 그때는 공사를 완공한지 이미 10여년 세월이 지난후였다.

    건륭16년, 즉 다시말하면 청의원을 건설하기 시작한 이듬해에 건륭황제는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연경8경을 제정했다.  

    이 서산청설도에서 묘사한 서산설경이 그중 하나이다. 청의원이 건설된 후, 원래의 화면과 비교해볼때 우리는 서산앞에 하나의 풍경이 증가된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곤명호이다. 곤명호는 청나라 황가원림가운데서 최고의 수면이다. 청의원이란 이름도 곤명호의 푸른물결 넘실거리는 물의 상태에서 따온 것이다. 곤명호와 만수산의 결합은 또한 청의원으로 하여금 최고의 황가원림으로 되게 했다. 당초 서호를 준설한후 옹산의 남쪽에 넓은 수면이 있어 수면이 주체인 산수원림의 추형을 형성했다. 그러나 한쪽이 호수와 인접한 만수산은 딱딱해보였다. 그래서 건륭황제는 성지를 내려 만수산뒤로 통하는 후계하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인공으로 좁힌 몇곳의 가파로운 하구는 원래의 평정한 강물에 환급변화가 있게 하여 미감을 더해주었다. 후계하강물은 만수산뒷산을 돌아 동부의 원림을 가로질러 앞쪽의 호수와 일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만수산은 명실상부한 도산(島山)으로 되었다. 

    곤명호를 바라보면 시띠 및 공지댐은 광활한 호수의 수면을 3개수역으로 나누어  호수로 하여금 주된것과 부차적인 것을 분명히 하고 각자 특색을 갖게 했다. 남호도는 17공다리와 결합해 앞쪽의 호수 수면으로 하여금 층차를 형성하게 하여 훤하고 광활한 대호와 듬직하고 웅위로운 앞산을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게 했다.  호수와 산에대한 이런 개조를 통해 산을 에돌아 물이 흐르고 산과 물이 서로 의지하며 산이 물때문에 살아나는 원림의 경지에 도달했다.

    원림공사의 확대는 건륭황제로 하여금 수리건설을 하는 김에 원림을 건설한다는 해석이  어불성설로 되게했다. 사람들은 청의원건설의 진정한 원인을 탐색할때 동시에 후세에 유전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다른 한 사정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그림이 묘사한 것은 건륭황제가 강남을 순시한 성황이다. 그러나 이 일은 실제로 청의원건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베이징서쪽 옹산서호의 수리건설이 금방 시작되던 그 해 궁정화사 둥팡다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항저우로 남하해 서호풍경전경도를 그렸다. 둥팡다의 이 행차는 건륭황제의 뒷날 강남행의 서막을 열었다. 건륭16년 정월13일, 원림공사가 전면적으로 전개할 즈음에 건륭황제는 경성에 남아 공사의 진척을 감독하지 않고 황태후를 수행해 강남시찰을 떠났다. 이는 건륭황제의 첫 강남행이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건륭황제는 이번 행차에 둥팡다가 그린 서호전경도를 휴대했다.

    5백년전, 청나라 황실의 선조인 대금국의 황제 완옌량(完顏亮) 도 사신을 항저우에 파견해 서호두루마리그림을 그리게 했다. 후에 강남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한 이 두루마리그림은 완예량이 남송을 침략하는 작전지도가 되었다. 그러나 서호를 쳐들어가기도 전에 완예량은 타향에서 객사했다. 끝내 친히 강남풍경을 보려는 숙원을 실현하지 못했다. 중원의 주인이 된 청나라 황실로 놓고 말하면 경제 문화상에서 강남의 중요한 지위는 전국에서 으뜸갔다. 그래서 각별한 중시를 받았다. 건륭의 조부 강희황제는 예전에 6차례나 강남에 내려가 민정을 고찰했다. 어려서부터 한문화교육을 접수한 건륭황제도 똑같이 짙은 강남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강희황제와 비교할때 건륭황제는 강남의 풍경에 마치 더욱 큰 사랑이 있었던 것 같다. 조부 강희황제처럼 건륭도 6차례 강남에 내려갔다. 그의 앞 3차례 강남순시는 마침 청의원건설기간이었다.

    역대 문인들이 반복적으로 칭송한 항저우서호의 아름다운 경치가 건륭황제의 눈앞에 펼쳐졌을때 그는 자기가 휴대한 서호전경도에 한수의 시를 적었다. 시의 의미는 원래 서호도에 묘사한 산수는 다만  대략 적이였지만 현재  실경을 대조해보니 매 곳을 가히 상세하게 요해할수 있었다. 직접 고찰하는 것이 도면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확실히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건륭황제가 강남실경과 풍경 두루마리그림을 비교한 의도는 훗날 청의원건설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났다.

    만수산 동쪽기슭에 위치한 이 작디작은 원림은 처음 건설할때 후이산웬(惠山園)이라고 불렀다. 만약 후이산웬의 경관과 우시(無錫)의 지창웬(寄暢園)을 비교해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다. 양자는 극히 비슷했다. 지창웬에는 즈위챠오(知魚橋)가 있는데 이름은 장자의 명구에서 따왔다. 교량본체가 낮아 수면과 접근해 물고기를 관상하기 편리하다. 후이산웬에도 이와 같은 즈위챠오를 건설했다. 우시 지창웬에는 8음간(八音澗)이 있는데 물이 돌사이에서 흘러 소리가 우아하고 듣기 좋다. 청의원의 후이산웬에는 옥금협(玉琴峽)이 있는데 물이 졸졸 흘러 8음간과 곡은 달라도 교묘한 솜씨는 같다. 후이산웬의 가산, 정자, 누대의 전반 구도는 지창웬의 정수를 받았다. 후이산웬은 늪을 중심으로 늪을 에돌아 하나의 대청, 하나의 수레, 하나의  다락, 하나의  재단, 하나의 정자, 하나의 다리, 하나의 길, 하나의 동굴 등 8개경관을 건설했다. 후이산 8경은 모두 강남경치의전형적이 대표이다. 후이산웬은 가경연간 세취웬(諧趣園)으로 개명하고 잔칭쉔(詹慶軒)의 앞에 한웬탕(涵遠堂)을 증축했다. 한웬탕의 건설은 원래 확 트인 시각효과에 영향을 주어 원림계에서 실패작으로 불리운다. 후이산웬은 건륭황제가 처음 강남을 내려갈때 얻은 수확이다. 그 후 건륭22년과 건륭27년 건륭황제는 또 두차례 강남을 순시했다. 매번 강남을 내려갈때 틀림없이 궁정화사가 수행했다. 건륭의 지시에 따라 강남의 아름다운 경치를 대량 모사했다. 한폭한폭의 그림은 수도로 보내져 마침 건설하고 있는 청의원의 견본과 참고로 되었다.

    항저우 서호에는 쑤띠(蘇堤댐)가 있고 청의원 곤명호에는 시띠(西堤서쪽댐)가 있다. 서호 쑤띠에는 6개의 다리가 있는데 청의원시띠에도 6개의 다리를 건설했다. 서쪽댐을 따라 심은 버드나무도 쑤띠와 같다. 전반구도에서 보면 항저우서호관광지는 산이 북쪽에 있고 서호가 남쪽에 있으며 호수의 수면 서부에 쑤띠가 있다. 베이징 청의원에는 만수산이 북쪽에 있고 곤명호가 남쪽에 있으며 호수의 수면서쪽에 시띠가 있다.  북산, 남호, 서쪽댐의 대구도는 양자가 거의 똑 같다.  이 한조의 화면에서 누가 어느 것이 서호이고 어느 것이  곤명호인지  분간할수 있을까? 그러나 만약 원림전반에서 관찰해보면 사람들은 또 비슷한 가운데 더욱 많이 다른 점을 발견할수 있었다. 예하면 서호에서 곧은 쑤띠가 청의원에서는 구불구불한 시띠가 되었다. 시띠와 곤명호 및 만수산의 배합은 아주 적절하다. 바로 이런 함의를 중요시한 참고와 지역에 따라 알맞게 제정한 재창작은 청의원의 경치로 하여금 강남과 매우 흡사하지만 또한 강남을 능가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서야 사람들은 건륭의 강남감정과 이 원림건설간의 밀접한 인과관계를 철처하게 깨닫게 되었다. 바로 강남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사랑과 동경, 그리고 베이징서교 옹산서호의 독특한 자연조건이 건륭황제의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없는 욕망을 자극해서 그가 식언을 하도록 촉구해 재차 원림건설을 시작하게 하였다.

    청의원 악수당(樂壽堂)앞에는 하나의 거석이 있다. 길이가 8미터, 너비가 2미터, 높이가 4미터, 무게가 20여톤에 달하며 베이징 팡산 산물이다. 최초 명나라 관리 미완중이 발견하고 재력을 아끼지 않고 이를 집으로 운반하려 했지만 결과 운반도중에 미완중은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이 돌은 미완중의 가산을 탕진하게 하였기에 사람들은 이돌을 패가석(敗家石)이라고 부른다. 그후  건륭황제도 이 돌을 마음에 들어 했다. 이 돌을 악수당앞의 병풍으로 만들려고 했다. 돌이 너무 커 이를 안마당으로 운반하기 위해 건륭황제는 심지어 태후의 반대도 무릅쓰고 마당문까지 헐었다. 후에 이 거석을 청지수(青芝岫)라고 다시 명명했다. 의미는 청색의 영지모양의 돌이라는 뜻이다.  팡산에서 운반해온 청지수는 청의원에서 가장 스토리가 있는 하나의 장식물로 되었다.

    실제로 청의원건설과정에서 운반해온 것은 이 돌뿐만이 아니다 가산을   쌓은 태호석은 강남에서 운반해왔고 전당을 건조하는 진귀한 목재는 전국각지에서 운반해왔다. 만수산의 소나무는 황산청송의 웅건하고 힘이 넘치는 기개를 나타내고 하늘을 잇고 해를 비추는 연꽃은 수향 연못의 서늘한 숨결이 일고 있다.

    쑤항(蘇杭)의 풍경외에도 각지의 유명한 풍경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남호도에 위치한   망섬각(望蟾閣)의 원형은 후베이성의 황학루(黃鶴樓)이고 뒷산의 4대부주는 티베트식 건축이다. 뚱띠곽여정과 남호도를 연결하는 17공다리는 베이징의 노구교(盧溝橋)를 모방해 건설했다. 17공다리의 길이는 150미터, 너비는 8미터 에 달하며 중간에서 부터 좌우양측으로 모두9개의 다리구멍(橋孔)이 있다. 9는 제일 큰 수로 황가의 존엄을 상징한다. 돌다리 양쪽의 난간에는 형태가 다른 돌사자를 조각해놓았는데 모두 540마리에 달해 노구교보다 59마리나 많다.

    청의원의 원림설계는 중화전통문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곤명호중의 3개의 작은 섬은 신화에 나오는 펑라이(蓬萊), 잉저우(瀛洲), 팡장(方丈) 3개의 선산에서 왔는데 원림을 인간선경에 비유하고 또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고대철학을 상징하고 있다。

    청의원뚱띠에 있는 물을 다스리는 동소(銅牛)는 날씨를 대표하고 있다. 곤명호서안에는 경직도가 있는데 남자는 경작하고 여자는 베를 짠다는 것을 전시한다. 양자는 멀리 마주해 중화 수천년의 농경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만수산 동쪽의 성관문창각(文昌閣)은 문창제를  모시고있다 만수산 서쪽의 성관숙운첨(宿云檐)은 무제관우을 모시고 있어 일동일서, 일문일무로 문치무공, 문무겸비를 상징하고 있다.

    남호도의 용왕묘에는 용이 있고 봉황돈에는 봉황이 있어 일북일남, 일용일봉으로 봉과 용은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내고 만사형통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중국전통문화중의 가장 아름다운 축복이다.

    청의원은 중화의 명산승경과 동방의 전통문화를 한몸에 집중하여 가히 청의원을 보면 천하를 본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기원 1764년, 건륭29년, 15년의 건설을 거쳐 청의원이 전부 완공되었다. 이는 상하 수천년의 문화축적과 수십만명 장인들의 심혈과 땀방울로 만들어진 하나의 원림이다.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금수화원이다. 건륭황제는 이 원림이 자손들이 초월할수 없는 기념비가 되길 희망했다.

    그 당시 대신 산허는 준설공사를 진행하면서 절세의 원림을 건설할 줄은  전혀 몰랐고 궁정화사 둥팡다도 서호도를 제작하면서 이 두루마리그림이 청의원설계의 참고가 될줄은 전혀 몰랐다.  꾸준히 추진한 시공에서 부터 한차례 또 한차례의 강남행에 이르기까지 청의원건설은 계획이 주도면밀했고 절차가 엄격했다.

    원림탄생의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사람들은 완정하고 상세한 건설방안이 건륭황제 한사람의 마음에만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최초의 영감은 다만 무심코 마주친데서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왕의 작품, 성세의 재산과 장인들의 지혜는 한사람의 영감을 배태하고 불러일으켜 전국 총동원의 웅대한 창작으로 발전 변화하게 하였다. 마치 청나라 말기 문인 왕카이윈의 시에서 말한것 처럼 누가 강남의 풍경을 멋지다고 말할까? 모든 아름다운 사물은 한사람의 흉금에 남아있다.

    곤명호의 동안에 하나의 작은 2층집이 있는데 석가루(夕佳樓)라고 부른다.  건륭시기에 건설한 것이다. 이름에서 볼수 있는 것처럼 이곳은 석양을 관상하는 최적의 장소이다. 석가 두글자는 동진의 시인 도연명의 시에서 따왔다. 석가루에서 바라보면 저녁무렵의 경치와 시중의 예술적경지가 완미하게 융합되어 청의원에서 하나의 유명한 풍경으로 되었다.

    건륭도 청의원에 해가 지는 경치를 묘사한 시를 적지않게 썼다. 그러나 그 본인은 종래로 이런 경치를 본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한 하나의 결정으로 일생을 속박했다.약속을 저버리면서 청의원을 건설했기 때문에 건륭은 자기에게 특수한 규정을 정했다. 매번 청의원에 갈때 다만 오전에가서 오후에 돌아왔으며 청의원에서 밤을 보내지 않았다. 이로서 자율과 반성을 하여 어쩌면 천하사람들의 양해를 얻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건륭황제는 자기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청의원의 밤경치를 감상하지 못한것이 건륭황제의 영원한 유감으로 되었다.

    석양아래의 청의원은 희미하고 허황했다. 그가 남긴 많은 이야기도 지금까지 여전히 풀지 못한 서스펜스로 남았다.

    번역: 진종호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4-04-14 10: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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