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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화원 2부 - 곤명호에는 건곤이 있다

  • 입력 2014-04-14 10:45:50 | 조회 1974 | 추천 166
  • 출처 C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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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제2부 곤명호에는 건곤이 있다

 [소개]

    기원 1764년 건륭 29년에 청의원이 완공되었다.청의원은 향산의 정명원, 옥천산의 정이원, 만수산 그리고 동쪽의 장춘원, 북쪽의 원명원과 함께 베이징의 서북부에서 하나의 방대한 원림구역을 이루어 역사에서 ‘3산5원’이라고 한다. 청의원은 많은 이야기와 전설 그리고 풀지 못한 수수께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버샹거가 있던 자리는 원래 구층으로 된 연수탑이 있었는데 원래 황태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건설된 이 건축이 거의 완공되기 직전에 갑자기 뜯어버리고 버샹거로 바뀌어버렸다.기재에 의하면 탑을 짓고 뜯는데 든 비용은 전체정원을 짓는데 드는 총비용의 십분의 일을 차지하였다. 탑을 뜯어버리고 불각을 지은데 대하여 후세사람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지만 진상은 의연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 밖에 세계에서 제일 긴 복도, 유다른 청리관의 작은 무대, 조형이 독특한 건축 ‘양런펑’, 쑤저우 싼탕제를 모방한 마이마이제, 그들의 뒤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청의원의 산수건축에는 고대정원의 예술이 어떻게 체현되었을까? 하는 것들이 본집에서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본문]

    기원 1764년, 건륭 29년 여름, 한차례의 큰비로 연꽃잎은 흔들리고 호수엔 물결이 넘실거리고 산색은 희미하였다. 사실 이것은 늘 볼 수 있는 강남풍경이 아니라 베이징 서북쪽 교외의 청의원의 비올 때의 풍경이다.

    청의원의 건설은 이 해의 빗물로 하여금 이전과는 다른 의의를 가지게 하였다. 시산, 옥천산의 빗물과 샘물은 한데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거미줄처럼 얽힌 수로를 따라 산 아래로 흘러가 대면적의 수전을 관개한다.

    이곳에서 심는 벼는 향긋하고 찰기가 있어 먹기 좋아 황실에서 전용하는 공물로 되었다.

    물은 위허를 통해 청의원의 곤명호로 흘러든다. 면적이 3천 3백 여무에 달하는 곤명호는 실제 베이징 서쪽에 위치한 인공저수지로 되었다.

    청의원을 건설한 동시에 새로 증설한 완쵄쫭 수리공정도 완공되었다. 이로써 청의원을 중추로 하는 베이징 서북쪽 교외 다섯 개의 황실원림 중의 네 개가 물길로 이어지게 되었다. 베이징 교외의 이 수리계통은 주변 논밭과 원림에서 사용하는 물을 제공하고 곤명호로부터 후청허까지 통하는 창허는 청의원과 즈진청을 한데 이어주었다. 당년 자금성으로부터 청의원에 가려면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육로는 씨즈먼으로부터 출발하여 왠밍왠을 경과하여 서쪽으로 청의원 따꿍먼을 통해 원내에 진입하는 것이다. 육로에 비해 수로를 이용해 청의원으로 가는 것이 퍽 빠르고 재미도 있었다.

    황제의 용주는 씨즈먼 밖의 이훙탕 부두에서 출발하여 창허를 따라 대략 9킬로미터를 가면 이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늘의 베이징성은 여전히 건륭 시기의 이 수로를 보존하고 있다. 수로 대부분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제일 좁은 곳은 배 한 척이 겨우 통과할 수 있다. 물길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의 궁형다리가 시야에 안겨오는데 이는 청의원의 수상문호로 슈이쵸라고 한다. 슈이쵸를 지나면 눈앞이 확 트이는데 곤명호의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산은 첩첩 물은 겹겹 길이 없나 했더니 버들숲 짙고 꽃이 밝은 곳에 마을 하나 있네 라는 시구와 흡사하다. 앞을 바라보면 쓰치쿵쵸우 흰색 다리 전체를 볼 수 있는데 곤명호 위에 있는 남후도우를 이어준다. 쓰치쿵쵸우의 다리 교각사이의 구멍을 통해 호수 동쪽 기슭의 돌제방을 볼 수 있는데 멀리 청관까지 구불구불 이어졌다. 용주가 쓰치쿵쵸우를 지나 서쪽으로 남후도우를 스쳐 지나면 곤명호와 만수산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져 호수와 산의 면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로써 청의원의 산수가 일체로 된 완정한 면모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산길이 구불구불하여 눈길을 뗄 수 없는 시각적 향수를 얻게 된다. 이는 고전 원림예술중의 먼저 감추고 후에 펼치는 걸음마다 풍경이 바뀌는 설계이념에 따른 것이다.

    “어느 곳에 연산 있어 회포 맘껏 풀랴 세상에 둘도 없는 풍광 쿤밍 뿐이네” 이는 건륭 황제가 청의원을 찬미하는 저명한 시구이다. 하지만 청의원이 후세에 넘겨준 것은 절세의 풍경과 오랜 전설, 흥미로운 이야기와 지금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쑤이무즈친 부두로부터 뭍에 오르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만수산 위의 웅위한 높은 누각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바로 불향각로 만수산의 핵심건축이다. 하지만 청의원의 최초의 설계 중에는 여기에 불향각가 없었고 9층 높이의 높은 탑이 있었다. 당년 건륭 황제가 모친을 모시고 강남에 갔을 때 항저우의 류허타를 유람하였다. 건륭 모자는 류허타를 매우 좋아했다. 하여 청의원 따뽀언얘쏘우스에 류허타와 난징 뽀언스의 얜쏘우타를 본떠 9층 높이의 얜쏘우타를 건설하기로 했다. 시공과정에 건륭은 수시로 친히 원내를 돌아보고 공정진도를 독촉하였다. 건륭 23년 한여름, 9층 높이의 얜쏘우타가 이미 8층까지 올랐다. 건물은 하늘에 우뚝 솟아 각별히 눈길을 끌었다. 8월 7일, 건륭은 다시 친히 공지를 시찰하였다. 하지만 단 이틀 만에 공정을 주관하는 내무부 총관 대신 싼허가 갑자기 이미 건설해놓은 8층 높이의 얜쏘우타를 철거하라는 성지를 받았다. 이 뜻밖의 성지는 모든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청나라 궁전 당안 친쓰땅의 기재에 따르면 탑을 짓고 철거하는데 모두 백은 37만냥을 허비했는데 이는 청의원을 건설하는 총 경비의 10분의 1에 맞먹었다. 얜쏘우타는 왜서 거의 완공되었을 때 갑자기 철거되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높은 탑을 건설하는 것은 불길하기 때문에 철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괴상한 것은 이러한 큰 사건이 유관 사료에 명확한 문자기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당사자인 건륭은 이에 대한 해석이 앞뒤가 같지 않았고 두루뭉술했다. 건륭은 자기의 “지과”란 시에서 얜쏘우타는 자기절로 넘어졌다고 썼다. 하지만 얜쏘우타는 분명히 그가 명을 내려 철거한 것이다. 후에 건륭은 탑을 철거한 것은 풍수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베이하이에 일찍 탑 한 개를 건설하였는데 이듬해에 화재로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건륭은 또 명나라의 《춘명몽여록》이란 책에 기재된 것을 인용하였다. 책에 베이징의 서북부에 높은 탑을 건설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씌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책 구석구석을 몽땅 뒤졌지만 이 구절의 출처를 찾지 못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탑을 철거한 원인은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도 갈수록 무성한 가지를 치고 있다. 건륭의 “지과”란 시에는 이런 두 구절이 있다. “남방의 불탑을 북방에 건설하려니 환경조건이 크게 달라 얜쏘우타는 끝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원림풍경의 각도에서 탑을 철거한 원인을 깊이 연구하였다. 남방의 류허타는 넓고 평탄한 지면에 건설되어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리지만 청의원에 이식하니 주위의 환경이 너무 달랐다. 핵심건축인 만수산 앞의 얜쏘우타는 원래 반드시 전체 원림 경물을 총람하는 중추로 마치 화룡점정의 역할을 해야 한다. 원림예술에서는 이를 점경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 9층 높이의 얜쏘우타가 만수산 위에 우뚝 솟아있으니 고립되고 너무 두드러져 주변의 건축과 비례를 이루지 않았다. 동시에 만약 얜쏘우타를 3개의 산 5개 원림의 전체 환경 속에 놓고 본다면 서남방향 위쵄산 위의 위뻥타, 묘꼬우타를 배경으로 경관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경물을 빌려온다는 원림예술의 하나이다. 하지만 실제 동쪽으로부터 서쪽을 바라보면 얜쏘우타와 위쵄산 위의 두 개 탑을 포합해 세 개 점이 한 개 선에 놓여 단조롭고도 중복된 감을 주고 거의 경물을 빌려올 수 없게 되었다. 건륭도 아마 얜쏘우타를 8층까지 지었을 때 갑자기 이 문제를 발견했을 것이다. 따라서 일체 대가를 아끼지 않고 자기의 과실을 바로잡으려고 결정했을 것이다. 때문에 건륭은 탑을 철거하는 일에 대해 시종 상세하지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설법은 사료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고증을 거쳤다고 말하나 고전 원림학에 의거한 내린 일종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얜쏘우타를 철거한 진상은 오늘도 여전히 이 원림이 오늘과 후세에 남긴 최대의 현념일 것이다.

    얜쏘우타가 철거된 후 건륭은 황가양식건물을 폐탑의 옛터에 짓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여 나무로 된 누각을 새로 설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후에 건설한 불향각이다. 버썅이란 낱말은 불경 중 불교에 대한 찬송에서 유래한 것이다. 불향각는 돌로 쌓은 높이가 20미터 되는 네모난 기초 위에 건설하였다. 가파른 기초와 호면이 기본적으로 수직되었는데 기초는 불향각의 무게를 크게 증가시킴으로써 불향각의 기세도 크게 높여주었다. 불향각의 폭은 41미터이고 누각 내에는 8개의 유창목 커다란 기둥이 천정까지 뻗어있다. 불향각는 8개 면, 3개 층, 4개의 겹처마지붕의 나무 결구로 건축되었다. 먼저의 얜쏘우타에 비해 기초가 든든하고 무겁고 웅위하며 개방되고 변화의 기상을 보여주는 버쌍거와 완쏘산의 횡적으로 뻗어나가려는 추세 및 중축선에서 밀집된 건축군과 더욱더 조화를 이루었다. 불향각는 등을 만수산에 기대고 남쪽을 향해 앉았는데 마치 원림내의 모든 경관을 통솔하는 군왕 같은 모습이다. 또 최대한도로 점경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옹근 원림풍경의 구도중심과 영혼이 깃든 곳으로 되었다. 만수산 앞의 어느 방향, 어느 각도에서 관찰하나 거의 모두 불향각를 볼 수 있다. 부동한 경물의 안받침 하에 불향각는 천변만화하고 의기가 범상치 않은 대가의 풍모를 보여준다. 만약 곤명호의 서남방향에서 시티를 지나 버쌍거를 본다면 또 다른 운치가 있다. 강남풍경과 북국의 풍광이 잘 어울리고 자연의 숨결과 황실의 기개가 혼연일체가 된 것이다. 이 절묘한 한폭의 산수화면 중에는 청의원 건설이념의 정화가 농축되어 있다.

    청리관은 만수산 앞산 서부에 위치해있다.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아름답고 듣기 좋다고 비유한데서 유래하였다. 청의원 시기의 청리관은 상하 두 개 층이고 면적이 큰 5개 칸으로 되었는데 중간엔 면적이 1백 20평방미터도 안 되는 작은 극장이 있다. 작은 극장은 보기에는 보통이나 남 다른 데가 있다. 일반 무대와는 방향이 반대인데 남쪽으로 향했다. 당년의 극장을 왜서 이렇게 건설했는지 고증할 바는 없지만 한 개 전설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황태후는 극을 보기 좋아했는데 건륭은 모친을 모시고 원림을 유람할 때 늘 이곳에서 한창 공연 중인 쿤취 “거지가 금을 줍다”를 감상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건륭은 때로는 친히 무대에 올라 모친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황제의 존귀한 위치를 보증하기 위하여 청리관의 무대를 남쪽으로 향하게 지었다고 한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곤명호는 복숭아의 모양으로 마치 원림에 대한 다른 한 전설을 실증하는 듯하다. 청의원은 모친의 축수를 위해 건설된 것이므로 곤명호는 바로 태후에게 드리는 한 알의 축수 복숭아를 본뜬 것이다. 이 전설이 사실인지를 떠나서 청의원엔 확실히 가는 곳마다 효심에 대한 선양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다. 청의원 러쏘우탕에는 백목련나무를 가득 심었다. 그것은 건륭의 모친이 남방에서 생장하는 백목련 꽃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건륭은 명령을 내려 남방에서 가져다가 청의원에 심게 하였다. 백목련 꽃이 필 때면 향기가 코를 찔렀는데 위썅하이라고 불렸으며 청의원에서 가장 이름난 경관 중의 하나이다. 베이징에서 백목련을 가꾼 역사는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청의원의 호우씨허에는 시장거리가 있는데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번화하였다. 사실 가게의 주인이나 심부름꾼과 고객 모두가 태감, 궁내의 부녀자들과 대신들이 역을 맡아 한 것이었다. 이 거리도 건륭이 모친에게 드리는 선물이었다. 건륭이 모친을 모시고 남방을 시찰할 때 일찍 수저우 산탕제에서 유람한 적이 있다. 이 곳 물고장의 경치와 산탕허 양안의 점포들은 황태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태후가 연세가 많고 강남길이 아주 멀었기에 자주 유람하기 불편하였다. 하여 건륭 황제는 청의원에 모친을 위해 이 저자거리를 만들었다. 호우씨허 시장거리는 또 수저우제라고도 불렀는데 길이가 2백 70미터이고 2백 개가 넘는 점포가 있었다. 거리는 수저우 싼탕제의 한 갈래 강물, 두 갈래 거리의 구조를 모방하였는데 점포는 북방풍격의 파이로우 형식을 채납하였다. 점포의 앞면은 모두 강을 향했으므로 배에서도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이때로부터 황태후는 베이징을 떠나지 않고서도 강남을 유람하는 즐거움을 향수할 수 있게 되었다.

    백가지 선행가운데 효가 우선이고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 청의원에서 체현되는 효심은 건륭이 아들로서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될 뿐만 아니라 군왕으로서의 일종 정치태도이기도 하다. 이로써 자신의 유가문화에 대한 숭배를 세상에 나타냈다. 그리고 이런 도덕의 선양은 더욱 쉽게 중국 한족민중들의 인심에 뿌리내리게 했다.

    태후는 원림에서 유람할 때 긴 복도에서 천천히 걸으면서 경물을 감상하기를 즐겼다. 긴 복도의 동쪽 시작은 요웨먼이고 서쪽 끝은 쓰짱팅이며 중간에 4개의 8각 겹친 처마로 된 정자가 있다. 류쟈는 봄을 대표하고 지란은 여름을 대표하며 츄수이는 가을을 대표하며 칭요는 겨울을 대표한다. 몇 개 정자를 돌고나면 1년을 보낸 것과 같다. 매 정자 지간의 간격은 약 3백보인데 이 거리는 곧바로 일반 행인들의 최적의 산책거리이다. 7백 28미터에 달하는 긴 복도가 산에 의지하지도 않고 벽돌 벽체가 받쳐주지 않아도 오랜 세월 처음처럼 든든한 것은 몇 개 정자의 교묘한 배치에 힘입은 것이다. 이러한 간격을 두고 분포된 정자들은 긴 복도의 경관을 단장했을 뿐만 아니라 긴 복도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산수 접경지대에 자리한 긴 복도는 뒷산의 주향에 따라 순리적으로 건설되었는데 마치도 구불구불한 채색 띠가 동서를 가로지른 것과 같으며 앞산 여러 곳에 분산된 경물을 한데 이어준다. 긴 복도의 횡목에 그린 만여 폭의 채색그림은 복도 밖의 자연경관과 서로 어울린다. 복도에서 유람하노라면 상하 좌우가 모두 풍경이고 복도 본신도 원림중의 제일 특색이 있는 하나의 풍경이다. 건륭 45년 2월의 어느 날 밤, 청의원에 한차례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순라하던 수위가 러쏘우탕에서 한 낯선 사람을 발견하였다. 원래 호우이꿍이라는 이 평민은 술에 취한 후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혼란을 일으켰다. 내무대신 등 몇 명의 관원들은 책임을 추궁당해 봉록을 삭감 당하였다. 평민이 청의원에 침입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가가 출입을 금지하는 지역으로 일반사람이 쉽게 진입할 수 있은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청의원에서 원창거로부터 씨궁먼 사이에 담장이 있을 뿐 기타 삼면에는 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황가원림에서 청의원 뿐이다. 청의원에 왜서 담장을 만들지 않았을까? 첫째는 제후들이 이곳에 거주하지 않은 것도 있고 다른 중요한 원인은 원림설계상의 고려 때문이었다. 이것은 건륭 조종실 화가 훙우가 그린 《경기수리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의원 시기 뚱티 밖은 무연한 전야로 크고 작은 원림과 촌락들을 안받침해주고 남쪽은 확 트인 평야이고 시티 바깥은 천연적인 수역과 논밭이며 원림의 서쪽에는 위쵄산이 있고 더 먼 곳에는 시산의 뭇 봉우리들이 있음을 똑똑히 보아낼 수 있다. 이 환경을 충분하게 이용하기 위하여 청의원은 담장을 건설하지 않음으로써 원림의 풍경과 주면의 자연경물이 유기적으로 일체로 융합되게 하고 무한하게 확장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고전원림예술중의 경치를 빌려 쓴다는 것이다.

    청의원에서 제일 기백이 있는 원림 건설 수법은 산의 경치를 빌려 쓴 것이다. 청의원 서쪽 수십 이 바깥의 시산을 원경이라 할 수 있고 나무가 울창한 위쵄산과 산 위의 위벙타를 중경이라 할 수 있고 산 아래의 푸른 농지와 원림을 통틀어서 근경이라 할 수 있다. 원경, 중경, 근경은 마치 수묵화처럼 경물은 먼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으로 오면서 색채가 옅은 데로부터 짙어진다. 먼 곳의 시산 뭇 봉우리들의 병풍아래, 근처 위쵄산의 안받침 하에 기껏해야 58미터 높이의 작은 만수산이지만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으며 비범한 기세를 나타낸다. 멀리 눈을 주면 시산의 뭇 봉우리들과 위쵄타의 그림자 모두 원림의 풍경 중에 응집되어 있다.

    산의 경치를 빌려 씀으로써 청의원이 중국 고전원림예술 중의 경전 작품이 되게 하였다.

    원림예술은 어떠한 국가, 어떠한 문화의 형상적인 체현으로 부동한 문화는 부동한 원림풍격을 형성한다. 청의원 먼저 건설한 왠밍왠에는 서양식의 원림건축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양식원림 배치는 반듯하고 엄격하게 대칭되며 조식이 섬세하여 기술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식 원림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중시하며 인간이 다듬은 흔적을 될수록 감춤으로써 인간이 만들었으나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은 예술경계에 이르게 한다.

    만수산의 뒷산에서 아직도 청의원 시기에 건설한 까이춘왠의 유적지를 볼 수 있다. 까이춘왠은 자연산세에 따라 건축을 3개 층으로 나누었다. 각 층간에는 산에 오르는 복도 혹은 돌로 쌓은 길로 소통되었으며 지세의 변화를 이용하여 건축의 고저, 들쑥날쑥한 효과를 거둠으로써 옹근 건축이 풍부한 형태와 민첩한 공간을 갖게 하였다.

    까이춘왠 3층에 위치한 칭커쇈은 원래 건륭의 서재였는데 실내 남측의 정면 벽은 모두 그대로 드러난 암석이다. 지금도 우리는 암석에 새긴 건륭이 청의원을 읊은 시구를 볼 수 있다. 이 천연적인 벽과 인공적인 건축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 서재에 풍치를 더해준다.

    청의원의 건축은 부동한 환경과 의경을 결합시키는 것을 중시하였는데 변화가 다양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원림중의 다리들은 평탄한 다리, 궁형다리, 정자다리 등 형태가 각이하고 크기가 다르다. 높이 솟은 위따이쵸는 용주가 통하고도 넉넉했으며 낮은 즈위쵸는 수면과 거의 맞붙었으며 무지개 같은 쓰치쿵쵸우는 길이가 1백 50미터이나 깜찍한 빤쵸는 한 걸음이면 건널 수 있다. 원림중의 30여개에 달하는 다리는 중국고전교량의 모든 형식을 거의 다 집결시켰다. 쓰치쿵쵸우 동쪽 끝에 있는 궈루팅은 청의원에서 제일 큰 정자인데 8각형이라 팔방정이라 부른다. 궈루팅은 24개 원형기둥과 16개 네모기둥이 함께 지탱하는데 위로 향한 뾰족한 겹처마지붕은 궈루팅을 쾌적하고 웅장하게 해준다.

    청의원에는 40여개의 정자가 있는데 각자 특색이 있고 다채롭다. 정자들은 산수 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운치를 더해주는 작품임과 동시에 사람들이 유람할 때 휴식장소임과 동시에 경관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된다.

    러쏘우탕 서쪽의 작은 뜰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수그리고 지면에 돌로 만든 장식조형을 내려다보게 된다. 조형은 쥘부채의 손잡이를 닮았는데 8개 가닥의 부챗살을 따라 앞으로 내다보면 눈앞의 건축이 바로 부채면의 형상이다. 모양이 펼친 쥘부채를 닮았다 해서 싼맨땐이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원림에서 조형이 가장 기이한 건축일 것이다. 그의 이름도 아주 기이한데 양런펑이라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진대의 문학가 왠훙이 관리로 부임하기 전에 친구 쎄안이 그에게 부채를 선물하였는데 왠훙은 친구의 뜻을 깊이 깨닫고 “나는 부임한 후 인덕을 펼쳐 백성에게 복을 마련해줄 것이다”라고 답사했다. 양런펑은 이 이야기에 근거하여 건설된 것이다. 건축이 특이한 외모의 배후에는 인의도덕을 선양하는 교의가 내포되어 있다.

    원림 중의 정자누각뿐 아니라 산, 돌, 풀, 나무 그리고 빛, 그림자, 연기, 노을, 비, 눈, 안개, 서리 모두가 원림 미경에서 빠뜨릴 수 없는 조성부분이다. 같은 건축이라도 부동한 시각과 부동한 계절이면 부동한 매력을 나타낸다.

    청의원의 미경은 때때로 건륭의 시흥을 격발시켰다. 그는 일생에 4만 2천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중 청의원을 노래한 시가 1천 5백여 수이다. 건륭은 또 함께 유람하는 대신들더러 자기와 함께 시를 읊고 쓰게 했다. 원림을 거닐며 경물을 감상하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군신들은 서로 어울려 분위기가 애애했다.

    원내의 평지, 산봉우리와 호숫가는 모두 울창한 수림에 가리고 마치 천생 적으로 가는 곳마다 정자누각이 있고 보물이 쌓여 있는 듯 교묘하게 많은 궁전을 지었다. 신의 힘과 사람의 기술이 여기에서 아름다움을 비기는듯하다. 이는 청의원의 풍경을 찬미하는 시이다. 들어보면 매우 특별한데 원래 이는 짱족어로 된 시를 한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시의 작자는 투관췌지니마로 청나라 제3세 투관활불이며 저명한 짱족 학자이다. 1763년, 27세의 투관은 조서를 받고 베이징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듬해 그가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마침 청의원이 낙성된 때였다. 건륭 황제의 위챈창스찬스인 투관은 늘 건륭을 모시고 청의원에 갔다. 이 시는 대개 당시 투관과 건륭이 합작한 작품일 것이다.

    건륭 시기 청나라 정부는 이미 몽골과 시짱 지구에 대한 완비한 관리를 실시하였다. 적지 않은 몽골과 시짱의 고승학자들이 조정에서 관직을 맡았으며 건륭과 각 종교 수령들 간의 관계가 밀접했다. 서로의 교제 중에서 건륭은 보살이라는 존칭을 얻었다. 건륭도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자기의 제왕의 형상을 대체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건륭 45년, 건륭황제가 70세 생일을 맞던 그 해에 곤명호에서는 길이가 40미터나 되는 큰 배를 만들었는데 이름을 쿤밍시룽조우라고 하였다. 9월 3일, 건륭황제는 시룽조우에 관한 일체 준비를 잘해 시짱 먼 곳에서 오는 귀빈을 영접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귀빈이 바로 제6세 빤찬어얼더니이다. 그는 친히 베이징에 와서 건륭 황제에게 축수하였는데 역사상 처음으로 베이징에 들어온 빤찬이다. 건륭 45년 음력 9월 16일, 빤찬어얼더니는 슈이쵸에서 용을 수놓은 깃발을 꽂은 시룽조우를 타고 윈후이위위 부두로 뭍에 올라 따뽀언얜쏘우스에 가서 향을 피우고 예불하였다. 당시 황가건축에서는 반드시 각종 종교의 불당사묘를 갖추어야 했다. 청의원에 종교건축이 많기로 황가원림 중에서 앞자리를 차지한다. 원림 곳곳에는 공양하는 불교, 도교, 짱촨 불교 등 여러 가지 불상 1만 5천 1백 20개가 있는데 새벽에는 종이 울리고 저녁에는 북이 울렸으며 목탁소리가 은은하고 향불이 자욱하여 불국천당이라고 했다. 만수산 앞산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즈후이하이의 외벽과 실내는 모두 채색유리기와로 장식되었는데 색채가 화려하고 조형이 장중하다. 이는 불교건축으로 전부 벽돌과 돌로 차곡차곡 쌓았으며 나무들보가 없어 우량땐이라고도 한다.

    만수산 뒷산의 짱촨 불교 건축 군을 4개 큰 부저우라고 한다. 불경의 묘사에 따르면 불은 수미산에 거주하였는데 바다의 사방에 4개 큰 부저우와 8개 작은 부저우가 있었다고 한다. 청의원의 4개 큰 부저우의 건축은 바로 불경 중의 우주세계의 현실적 체현이다. 이 건축군의 전후좌우에는 4개 큰 부저우가 있는데 매 하나의 큰 부저우 옆에는 두 개의 작은 부저우가 있으며 건축군의 4개 부동한 바향에는 4개의 부동한 색깔의 4개 범탑을 건설하였다. 탑 위에 있는 13층은 고리모양으로 바퀴처럼 서로 맞물렸는데 불경이 13이라는 것을 표시한다. 4개 큰 부저우의 동서 양측에는 각기 하나씩 타이땐이 있는데 받침대가 달 모양인 것은 웨타이라고 하고 받침대가 원형인 것은 르타이라고 하는데 불신의 주위에 해와 달이 돌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4개 큰 부저우의 중심에는 농후한 짱족색채의 건축이 있는데 썅얜쭝인즈거라고 한다. 이 건축은 시짱 지구에서 유명한 라마교사원인 쌍이스를 원본으로 건설한 것으로 썅얜쭝인즈거는 불경중의 수미산을 상징하며 4대 큰 부저우의 핵심건축이다. 각종 종교의 번창과 융합은 국가가 강성하고 변방이 안정되고 민족이 단결되었음을 상징한다.

    건륭은 청의원을 매우 좋아했는데 기재에 따르면 1백 32차 유람하고 불상 앞에서 절을 올렸다고 한다. 매번 만수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볼 때면 건륭은 총설계사마냥 자기의 명작을 흠상하였다고 한다.

    청의원은 부지면적이 3백 헥타르인데 수면이 약 4분의 3을 차지한다. 따뽀언얜쏘우스와 불향각를 핵심으로 하는 앞산 중앙건축군은 웅장하고 화려하며 호수와 산 지간을 단장하는 누각과 당헌, 복도, 다리, 정자들은 모두 자기의 풍채를 갖춤으로써 자연환경을 빌려 청의원의 미경이 원림 본신을 훨씬 초과하게 하였으며 산수의 뜻을 깨친 건축은 청의원의 내포로 하여금 원림 본신을 훨씬 초월하게 하였다. 건륭으로 말하면 청의원은 그가 제일 총애하는 원림일 뿐만 아니라 그의 치국이념과 정치이념의 모형이 응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의원은 남북풍광의 정화를 모두 집결시키고 청왕조 강토 내 부동한 자연환경을 대표한다. 경직도의 남자가 농사를 짓고 여자가 길쌈을 하는 경상은 농사와 길쌈을 가장 중시하고 산물이 풍부하고 백성들이 풍요로운 경제실력을 표현하고 아름답고 번화한 남방의 쑤이제와 장중하고 위엄스러운 4대 큰 부저우와 서로 결합되어 민족이 단결하고 문화가 융합되고 예와 교육을 중시하고 안정되고 조화로운 사회질서를 체현하였다. 청의원은 대체로 성세황제 심목 중의 천조대국 이상사회의 완미한 축소판이다.

    난후도에 위치한 꽝룬츠는 황가에서 사직의 평안을 기도하고 날씨가 좋기를 기도하는 곳이다. 기원 1795년 건륭 60년, 바로 건륭이 재위한 마지막 해인 음력 4월, 오랫동안 가물어 비가 내리지 않자 건륭은 친히 꽝룬츠에 가서 신을 모시고 기우제를 지냈다. 바로 그날 밤에 과연 비가 내렸는데 너무 기쁜 건륭은 이튿날 용왕에게 감사를 드리고 꽝룬츠의 호를 꽝룬링위츠라고 하였다.

    꽝룬츠에서 향불이 왕성할 때 멀리 서방에서는 기계생산이 수공노동을 대체하는 공업혁명이 바야흐로 힘차게 발전하고 있었다. 기원 1812년 청나라 쟈칭 17년 음력 5월, 건륭의 아들 쟈칭황제는 비를 비는데 영험하다고 다음해부터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정기적으로 관원을 꽝룬츠에 파견하여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동시에 증기기계가 서방에서 광범하게 사용되었고 증기기계를 동력으로 하는 윤선도 이미 만들어냈다. 기원 1860년 청나라 쌘펑 10년 음력 2월 27일, 건륭의 증손 쌘펑황제가 꽝룬츠에 가서 향불을 피우고 복을 빌었다. 이때 제2차 아편전쟁을 발동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함대는 이미 중국의 버하이완에 바싹 접근하였다.

    이는 청의원이 마지막으로 황제를 영접한 것으로 된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백년 화원은 한차례의 큰 화재로 철저하게 훼멸되었다.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4-04-14 10: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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