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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화원 3부 - 뛰어난 건출예술로 이화원을 건설하다

  • 입력 2014-04-14 11:08:04 | 조회 1953 | 추천 225
  • 출처 C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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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제3부 뛰어난 건출예술로 이화원을 건설하다

뛰어난 건출 예술로 이화원을 건설하다. 한 차례 대 화재 이화원 폐허로 한 그루 고목 약탈당한 후 재생, 한 가족의 출중한 기예 재현, 한 개 공사의 복잡한 내막 ,황실 원림 천고의 절창으로 시비와 공과는 후대들의 평판에 -PD수기

    [소개]

    1860년 10월 18일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 서쪽 교외에 있는 청의원 원명원 등 몇 곳 황실 정원에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었다. 이 후 자희태후는 황실 원림을 다시 건설할 것을 제출했다. 그러나 많은 대신들의 반대로 부득불 포기하고 말았다. 광서 황제가 즉위한 후 대권을 장악한 자희태후는 재차 황실 정원을 건설할 주장을 내놓았다. 광서 황제의 아버지 순친왕의 지지아래 황실 원림 재건설은 드디어 현실로 되었다. 그러나 괴상한 일은 원래 내무부에서 책임지기로 했던 황실 원림 재건공사가 도리어 해군 아문에서 도맡아 하게 되었다.

    재건 공사 총설계사 뇌정창은 양식뢰의 제7대 계승자로 그는 자기의 심혈과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뛰어난 기술을 전부 황실 원림 재건 공사에 투입했다. 황가 원림 공사가 완공된 후 이름을 이화원으로 바꾸었다. 뇌정창은 이화원이 최종 황실 원림으로 될 줄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안내]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삼산오원(三山五園)을 불태웠어요.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도 그 번 큰 불로 홀딱 다 타버렸어요. 여러 분들이 여기를 보세요. 이 고목에는 아직도 당시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어요. 

    [해설]

    1860년 10월 18일 오후 2시 청의원은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방화자는 다름아닌 4년전 제2차 아편전쟁을 도발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다.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청정부를 협박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영국 종군 기자 워그먼은 당일 국내로 보낸 신문기사에서 자기가 청의원 내에서 목격한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높은 곳에서 전체 청의원을 굽어볼 수 있는 높은 누각이었다. 누각은 높은 황강암 계단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주변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였다. 마치 불바다 속의 거대한 제단 같았다.

    다른 한명 종군 기자 베아토는 사진 형식으로 그 번 재난을 기록했다. 큰 불이 지나간 뒤 만수산 위에 있는 불향각은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없어졌고 뒷쪽의 유리벽로 쌓아올린 지혜해가 드러났다. 앞 산 중부의 대보은연수사도 전부 폐허로 되었다. 만수산 동쪽의 수목자친 옥란당 등 건축물은 초토화 돼버렸다. 뒷산의 4대부주의 목조 건축물도 모두 타버렸다. 워그먼은 신문기사 결말에 이렇게 썼다. 청의원 내 온통 볼품이 없이 돼버렸다. 남은 것이 견고한 큰 바위 뿐이었다. 남아 있는 큰 바위는 앞으로 후대들에게 이 곳은 전에 아름답고 절묘한 황실 정원이었다는 것을 전하게 될 것이다.

    청의원 뿐이 아니었다. 이날 베이징 서쪽 교외에 있는 몇 곳 황가 원림도 전부 불에 타버렸다. 황실 원림의 훼멸은 6일 후 베이징 조약으로 탈바꿈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800만 냥의 은을 배상받았다. 영국은 또 구룡과 신계를 탈취했다. 청정부 관원이 예부 홀에서 영국 프랑스 대표와 조약을 체결할 때 베이징 서북부 하늘에는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체결식에 참석한 관원들은 지어 송백 나무가 타는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건륭 황제가 지혜와 심혈을 쏟은 재건한 청의원은 이렇게 소실됐다. 

    대 재난이 지난 뒤 폐기된 청의원은 쓸쓸한 가운데 26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1886년의 어느 날 몇 사람들이 청의원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들은 원림이 훼손된 상황을 자세히 조사했다. 맨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뇌정창이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양식뢰라고 일컽는다. 뇌씨 가족은 대를 이어 황실 공사 건설을 맡았다. 이미 피서산장 원명원 창춘위안을 설계 건설했고 자금성 첨단 청의원을 보수한 적이 있다. 1860년 뇌가네 제7대 후계자 뇌정창의 나이는 15살밖에 안 되었다. 그는 청의원의 그 번 대 화재를 목격했다. 뇌정창은 26년 후에 폐허로 된 청의원에 들어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그의 운명은 청의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뇌정창은 이번에 순친왕 혁현의 명령에 따라 청의원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혁현은 함풍황제의 남동생으로 자희태후 여동생의 남편이며 광서 황제의 친아버지다. 1860년 청의원이 불에 탈 때 그는 함풍 황제와 함께 청덕에서 피난을 하고 있었다. 현재 혁현은 자희태후가 가장 신임하는 대신 중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혁현의 지위 변화는 청의원의 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청나라 통치자는 기후가 서늘한  관외에서 왔기 때문에 베이징의 건조하고 무더운 여름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관내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청나라 황실은 베이징의 서쪽 교외에 황실 원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전성기에 있을 때 황실 원림은 제후들이 레저 오락 온화한 마음을 가꾸는 장소였고 국태민안 태평성세한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나라가 쇠퇴기에 들어섰을 때 황실 원림의 건설 여부는 모순의 불씨로 되었다. 26년 이래 황실 원림의 재건을 두고 조정 내부에서는 쟁론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1873년 바로 황실 원림이 불에 탄 13년 후 황실 원림을 재건할 데 관한 화제가 다시 떠올랐다. 당시 금방 즉위한 동치 황제는 원명원을 재건할 데 관한 조서를 내렸다. 비록 황제가 조서를 내렸지만 대신들은 이는 자희태후의 뜻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원명원을 재건할 데 관한 조서가 내려지자 조정 내에서 큰 분쟁이 일어났다. 공친왕 혁흔과 순친왕 혁현을 위시로 한 반대파들은 현재 국력이 쇠약해지는 가운데 원명원을 재건하면 천하 사람들의 인심을 해이하게 만든다고 인정했다. 혁현은 지어 조정에서 한바탕 통곡까지 하면서 황제가 원명원을 재건을 중단할 것을 청구했다. 최종 동치 황제는 양보와 더불어 원명원 재건 공사를 중단한다고 선포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또 13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1886년 황가 원림 재건할 데 관한 제의가 재차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앞장서서 제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동치 연간에 원명원 재건을 견결히 반대했던 순친왕 혁현이었다. 혁현은 어떤 원인으로 하여 주장을 바꾸었을까?

    원래 원명원 재건 풍파가 지난지 얼마 안되어 동치 황제가 사망했다. 그날 저녁 황제의 명령이 양심전 동난각에서 내려졌다.

    자희태후가 4세 된 재첨을 황제로 즉위시켜 광서 황제로 되었다. 광서는 바로 순친왕 혁현의 친아들이다. 혁현은 자희태후의 권력을 두려워해서인지 아니면 아들이 겉으로는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지만 길흉을 모르는 아들의 앞날에 대하여 걱정해서인지 혁현은 당시 머리를 조아리며 통곡하고 인사불성이 되어 땅에 쓰러졌는데 부축해도 일어서지 못했다. 아들이 즉위한 후 혁현은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했다.

    1885년 10월 조정에서는 바다 방어를 부흥시키기 위해 해군 아문을 창립했다. 관직을 그만두고 10년 간 한거(閑居)한 혁현은 명령을 받고 해군 사무를 맡았다. 비록 군사 실권을 장악했지만 구체 업무는 이홍장이 주관했다. 그에 비해  혁현은 한가하지는 않았다. 처리하기가 더 힘든 일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1886년 16세 된 광서 황제가 곧 정사를 돌보게 되자 자희태후는 이를 황실 원림을 재건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때는 자희태후가 이미 대권을 장악한 때였다. 그러나 동치 연간에 일어났던 원명원 재건 풍파는 그를 망설이게 했다. 시국이 어서순한 이때 원명원 재건을 위한 충분한 이유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혁현은 태후의 뜻을 깊이 알아차렸다. 아들이 황제로 된 후 혁현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으로 변했다. 일 처리에서 먼저 황제와 태후 간의 관계를 고려했다. 황제가 곧 정사를 돌보게 되는 현시점에서 만약 황실 원림을 건설하여 자희태후가 황실 원림에 가서 양로하면 정사에서 물러날 수 있어 황제가 더 많은 실권을 장악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혁현은 아들의 이익을 고려하여 입장을 바꾸었는데 원명원 재건의 반대파로부터 견결한 지지자로 나섰다.    

    폐기된 5개 곳 황실 원림 중 원명원의 부지가 가장 컸고 훼손 정도도 심해 재건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동치 연간의 원명원 재건 풍파까지 곁들이면 원명원 재건은 너무 민감하여 다시 제출하기 어려웠다. 한편 창춘위안 징밍위안 징이위안은 규모가 너무 작아 자희태후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혁현은 최종 청의원을 선택했다. 

    청의원의 부지 규모는 아주 적합했다. 천연적인 산과 물이 있고 일부 건축의 기본 구조가  남아 있어 재건하기가 쉬웠다. 아울러 청의원은 건륭 황제가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여 건설한 원림이었다. 이번에 자희태후를 위해 재건할 경우 일을 추진할 근거가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건륭 연간 곤명호에서 해군 훈련을 한 바 있다. 현재 조정에서는 한창 북양 해군 창립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혁현에게 청의원 재건을 가동하는 좋은 기회로 되었다. 1886년 9월 순친왕은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곤명호 해군 훈련제를 회복하도록 청구했다. 아울러 공친 태후가 해군 사열을 위해 곤명호 주변 일대 파손된 건축물을 재건하도록 청구했다.

    이 상주문을 본 자희태후는 아주 만족해 했다. 자희태후는 즉각 비준했다. 또한 해군 아문이 곤명호에서 해군을 훈련시키려면 자체로 돈을 모아 낡은 건축물을 재건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원래 내무부 봉신원에서 책임지기로 한 황실 원림 재건이 도리어 해군 아문에서 도맡게 되었다. 청나라 사상 가장 괴상한 공사가 조용히 서막을 열었다.  

    순친왕 혁현으로부터 원림 공사 총설계사로 임명된 뇌정창은 청의원의 현황을 상세하게 조사했다. 그 당시 청의원은 볼품이 없는 모습이었다. 17공교(十七孔桥)는 한백옥으로 만들어졌기에 큰 재난을 피할 수 있었지만 다리 목 돌난간은 엄중하게 파손됐다. 만수산 정상의 송백나무는 얼마 남지 않았다. 불향각을 잃은 화강암 계단은 부분적으로 붕괴됐다. 보운각은 거의 잡초 속에 파묻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처마는 볼품이 없이 파손되어 옛날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돌배 밑에는 사람의 키만큼한 나무 몇 그루가 자라났다. 건륭 연간의 청의원은 설계 도면은 원명원 양식방에 보관해 두었는데 1860년 대 재난때 대부분이 분실됐다. 뇌정창은 남아 있는 유물을 기초로 경험을 곁들여야만 청의원의 원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뇌정창이 질서 정연하게 준비 사업을 진행할 때 혁현은 재건 경비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온갖 방법을 대여 모금을 하려 했지만 청의원 재건을 위해 모금한다는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1886년 말 혁현은 이홍장에게 보낸 차용 편지에서 이홍장을 당장 만나고 싶었으나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혁현의 고민은 뇌정창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때는 청의원 재건 준비 사업이 관건적인 절차  입체설계모형(燙樣) 제작에 들어간 때였다. 먼저 이미 측량한 수치에 근거하여 일정한 비례에 따라 종이 조각 나무오리로 건축물 모형을 만든다. 그런 다음 작은 인두로 다림질하여 모형을 만든다. 이것이 바로 입체설계모형이다. 맨 마지막으로 입체설계모형에 설명서를 부착하고 건축물의 칫수 형상과 구조에 상세하게 주를 달아 황제와 태후에게 보내 어람하도록 한다.

    이 것은 덕화원 대희루(大戲樓) 입체설계모형이다. 청의원에는 원래 대희루가 없었다. 자희태후가 극 구경을 즐겼기 때문에 이번에 황실 원림을 재건할 때 특별히 대희루를 추가해 그의 애호를 만족시켰다. 애초 설계 중 덕화원 대희루는 곤명호가에 있는걸로 되었는데 건축물 절반이 호수까지 뻗어나갔다. 후에 광서 황제의 비준을 걸쳐 만수산 동쪽에 건설하기로 했다. 건설된 대희루의 높이는 최고 21미터에 달했다. 대희루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완정하게 보존되고 규모가 가장 큰  발코니식 건축물이다. 

    입체설계모형이 심사하여 결정된 후의 절차는 도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뇌정창은 청의원 재건 관련 도면을 적어도 308장 그렸다. 사용한 도구는 고작해야 컴퍼스 직각자 붓 탄필 뿐이었다. 그는 청의원의 전부 판도에 예전 청의원에 있는 건축물을 일일이 표기했다. 뇌정창의 계획중 이런 건축물들은 모두 다시 복원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곳 건축물이 판도에 표기되지 않았다. 수과타는 확실히 청의원 원림공사 중 가장 먼저 건설되었고 유일하게 해군과 관련된 건축물이었다. 수과타는 곤명호 해군 학당이다.

    1886년 말 해군 학당이 청의원 경직도 풍경구 폐허에 건립됐다. 해군 학당이 개학한 날 몇몇 해군 아문의 관리들이 총망하게 개학식을 마친 후 만수산에 가서 성황리에 거행된 배운전 공량식에 참가했다. 

    만수산 앞 산 한복판에는 예전에 청의원 대보은연수사가 소재해 있었다. 현재 대보은연수사 원래 자리에 배운전을 건설하기로 했다. 배운전은 자희태후를 위해 건설한 것으로 청의원 재건공사 중 핵심 프로젝트였다. 1886년 말 배운전 공사는 자희태후의 배려하에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낙타는 당시 중요한 운송도구였다. 낙타는 깊은 산 속에서 건축공사에 수요되는 청흑색의 흑연을 운송했다. 운임을 절약하기 위해  낙타는 청흑색의 흑연을 건축 공사장에 날라들인 후 공사장의 폐허 잔류를 밖으로 날라갔다.

    뇌정창은 자금성 외조(外朝) 형식을 모방해 배운전을 3개의 뜰을 가진 정원으로 나누어 절과 조전이 일괄화된 건축군(建築群)을 이루게 했다. 배운전 공사는 공사 현장 정리로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청의원 재건 공사에 관통됐다.

    배운전은 황실 원림 내에서 부피가 가장 큰 궁전이고 건축 공사도 거대했다. 당시 한 노동자가 하루 일하면 한 공(一个工)이라 했다. 백운전은 내부 장식만 해도 27만 5724명 노동자를 고용했다. 백운전의 전 내 면적은 800 제곱미터에 달한다. 내부 장식시 먼저 완전히 가로막거나 절반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궁전을 부동한 공간과 구역으로 분할했다. 분할시 공간의 유동감과 통투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장식 미화기능을 고려해야 했다. 이 것이 중국식 건축 중 특유한 장식 기교다. 배운전 중 공간을 분할해 장식한 것이 무려 7가지로 총 29건에 달한다. 수량이 많아 중국 고전 원림 건축물 중 첫손에 꼽힌다.

    이렇게 가로막는 것을 비사추(碧紗櫥) 또는 칸막이라고 한다. 비사추 가운데 두 개 문은 열 수 있는데 공간의 크기는 수요에 따라 장악할 수 있다. 비사추 위의 목각 도안에는 만 자 박쥐 및 수도(壽桃)를 새겨 넣는데 만복만수의 뜻이 담겨 있다.  

    장식성이 극히 강한 것은 레이스다. 절반을 가로막은 장식의 일종이다. 레이스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 이것은 난간 레이스다. 착지한 두 개 난간 공간을 3등분으로 나눈다. 윗쪽의 남색 자사(夹纱)는 저장산 마사로 섬세하게 잘 짜여졌는데 바람에 흔들릴 때는 마치 날아예는 박쥐 모습 같았다. 난간 레이스의 조각패널은 당시 유행한 공예가 복잡한 투조를 채용했다.  

    이것은 팔각 레이스로 팔각 형태를 나타냈다. 레이스 패널에는 꽃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마치 빙판이 갈라터진 듯한 무늬 같아서 빙레이원(冰裂紋)이라고도 일컽는다. 이런 간단한 도안은 황실 궁전의 레이스 장식에서는 아주 보기 드물다. 장식 형식이 번잡하고 조각이 많은 것은 배운전이다. 이 간결하고 대범한 도안은 시각의 중복과 피로를 깨뜨려 눈 앞이 환하게 했다.

    레이스는 장식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기능도 갖고 있다. 이것은 캉조우(炕罩)다. 침대를 놓기 전에 시선을 가리우는 역할을 한다. 안에는 커튼을 걸 수 있다. 자희태후는 생일 축하연을 열기 전에 이 곳에서 휴식했다.    

    골동품은 진열하는 다보격 중간에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굴처럼 생긴 문이 있다.이 것도 절반 칸막이 장식으로 되었다. 기재에 의하면 배운전 내에서 다보격만 자단목으로 장식했다. 당시 자단목의 가격이 비싸고 적어 대량으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뇌정창이 구입한 목재는 거의 모두가 일반적인 화리목과 가래나무이였다. 화리목의 색상은 연하고 가래나무는 검고 광택이 없다. 고귀하고 우아함을 나타내기 위해 뇌정창은 재목에 염색처리를 했다. 

    전하는데 의하면 자희태후는 배운전을 자기의 침궁으로 만들려고 했다. 공사가 아직 완공되지 않았으나 그는 더 기다릴 수 없어서 침궁으로 들어갔다. 결과 그날 저녁 그는 큰 병에 걸렸다.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이 곳은 전에 대보은연수사였다. 혹시 절 자리에 침궁을 지어 신에게 무례한 짓을 하여 병에 걸린게 아닐까. 그는 침궁을 다시 낙수당으로 정했다. 이 전설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운전은 최종 자희태후 생일 축하연을 여는 장소로 되었다.    

    배운전 노천진열 위치도에서 아랫 쪽 두 개 동그라미가 있는 위치에 백송이 심어졌다. 소나무는 장수의 뜻이 담겨 있어 생일 축하연을 여는 장소로서의 배운전의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두드러지게 했다. 

    정원 내 노천에 배열된 물품은 순서에 따라 번호를 매겼다. 이런 청동기의 일부는 궁정 내에서 후세에 전해진 진귀한 보물이다. 또 일부는 자희태후 생일 선물이다.

    현재 문창원 전시청에 진열되어 있는 이산시준(三犧尊)은 2천여년 전 상나라 말기 것으로 전에 배운전 내 노진돈에 진열되었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일부 건륭 시기의 유물은 정리하여 새로운 청의원의 노천에 진열했다.배운전 앞의 이 두 마리 동 사자는 창춘위안의 폐허에서 옮겨온 것이다.조형이 12가지 띠로 된 12개 태호석도 창춘위안의 유물이다.

    배운전의 토목건축 시공으로부터 장식 진열에 이르기까지 뇌정창의 심혈이 깃들어 있다. 건축물 주체와 내부 장식 및 외부 진열은 서로 잘 어울려 완전히 하나로 어우러졌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고전 원림예술의 완정한 설계 이념이다.

    황실 원림 재건은 줄곧 비밀에 붙이고 소문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같이 방대한 공사는 진상을 가릴 수 없었다. 조정과 민간에서는 갈수록 여론이 분분했다. 1888년 3월 자희태후는 여론을 막기 위해 아예 광서 황제의 명의로 조서를 내려 청의원은 건륭이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 재건한 것이라고 했다. 광서 황제도 청의원을 재건하는 것으로써 황태후에게 효도했다. 그는 양생과 온화함을 추구하는 뜻을 담아 청의원을 이화원으로 바꾸었다. 이때에야 비밀리에 1년여 간 진행된 황실 원림 재건 공사가 천하에 밝혀졌다.

    황제의 조서가 내려짐에 따라 줄곧 황실 원림 건설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 혁현은 비밀리에 돈을 마련하던 데로부터 공개적으로 남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청나라 해군 창립이 관건적인 시기에 들어갈 때었다.

    1888년 말  이화원 공사가 공개된지 반년이 된 후 북양 해군은 정식 창립됐다. 이때로부터 중국은 세계 제8위 아시아 제1위의 해군 함대를 보유했다. 북양 해군은 발해만에서 한 차례 대 규모 해군 사열행사를 치렀다. 이 신식 군함은 위엄이 있는 이름이 있었다. 그중에는 사람들이 익숙히 아는 진원호 초용호 양위호 등이 포함된다.

    이화원 곤명호 서북 끝자락에 배 한 척이 있다. 이 거대한 돌배는 청의원 시기에는 석방이라고 일컽었다. 석방은 강남에서 강 기슭에 배를 정박시키는 습관에 따라 배 뒷부분은 밖으로 향하고 뱃머리는 강 기슭을 향하게 했다. 당년 석방의 창루는 중국 전통 양식으로 되었다. 건륭 황제는 항상 물은 배를 움직이게 할 수 있고 뒤집기도 할 수 있다는 도리를 잊지 않도록 자기를 일깨웠다.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석방 창루를 불살라버렸다. 이번에 황실 원림을 재건할 때 석방도 원상이 복원됐으며 이름을 청안방으로 바꾸었다. 양식도 자희태후의 기호에 따라 서양식 창루로 만들었다. 창루를 만든 데 사용한 재료는 돌 같아 보이었지만 사실상 나무를 사용했으며 대리석 무늬를 곁들였다. 청안방 선체 양측에는 두 개 서양 기선식 바퀴 모양의 기계를 첨가했다. 석방이 건설된 후 자희태후가 이 곳에 앉아 차를 마시고 피서 관광을 하며 추석에 달 구경을 했다. 아마 청안방 외곽이 군함과 얼마간 비슷한 이유로 후에 어떤 사람들은 석방을 영원히 침몰되지 않는 제국 해군의 상징으로 여겼다. 만약 진짜 그럴 경우 이 출항할 수 없는 돌배는 마치 처음부터 청나라 해군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시한 것 같다.    

    꽤나 규모를 갖춘 북양 해군은 창설된지 얼마 안되어 경비는 점점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해군의 경비 지원을 받던 이화원 공사도 재정 곤란에 빠지게 됐다. 따라서 일부 편벽한 곳에 있거나 기능이 적은 건축물은 간소화된 조형으로 건설됐다. 또 일부 건축물은 아예 재건을 포기했다.

    이것은 청의원 담화각이 불에 타기 전에 남은 세계 유일의 사진이다. 우리는 사진에 근거하여 애니메이션 방식을 취해 건륭시기 이 건축물을 복원했다. 담화각은 두 층 겹처마 지붕으로 된 누각 육각 찬첨 지붕으로 되었다. 건축물 평면은 마치 월화미인꽃 같아 담화각이라고 했다. 담화각은 만수산 동쪽 산기슭 고지에 우뚝 솟아있으며 청의원의 청산녹수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야화각은 종교 건축물이다. 야화각에 올라 멀리를 바라보면 곤명호의 전경이 한 눈에 안겨온다. 뇌정창은 담화각 재건에 적어도 세 가지 방안을 준비했다. 먼저  두 층으로 된 누각을 한 층으로 간소화하고 겹처마를 홑처마로 바꿨다. 그러나 기존 건축물의 담화형 기틀은 보류했다. 다음 기존의 찬첨 지붕을 없애버렸다. 뇌정창은 후에 다시 찬첨 지붕으로 바꿨다. 최종 경비 제한으로 이 건축물은 십자형으로 되었다. 모양이 더는 월화미인꽃 같지 않아 이름을 경복각이라고 바꾸었다. 단 층으로 된 경복각은 청의원 내 전경을 굽어볼 수 없게 되어 비 구경을 하는 장소로 되었다. 만수산 동쪽 기슭은 담화각이 없어진 후 중요한 점경 건축물의 작용을 잃게 되었다.        

    경복각의 간소화와 비교하면 일부 건축물은 더욱 불행했는데 영원히 소실되었다.

    치경각은 곤명호 세 개 섬 중의 하나인 단성도의 중심이다. 단성도와 남호도 조감당도는 함께 동해에 둥둥 뜬 세 개 선산을 상징한다. 이 노란색 유리 기와 지붕으로 되고 조형이 특이한 높고 큰 건축물은 마치 상상 속의 선산경각의 모형 같았다. 치경각은 전에 청의원 서북쪽 호수 수면에서 가장 눈에 띄이는 점경 건축물이었다.

    기재에 따르면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불 질렀을 때 호수 수면의 도크가 타버렸다. 고현호의 치경각을 보면 멍하니 바라보며 탄식할 뿐이다. 치경각은 이렇게 요행 남게 되었다. 그러나 동치 연간 치경각의 목재는 분해하여 원명원 재건에 사용했다. 최종 치경각은 건축물 평면만 남았다.

    뇌정창은 치경각을 재건하기 위해 채색도안 견본을 제작했다. 하지만 경비 부족으로 이 건축물은 영원히 도면 설계에 그쳤다. 지금 이 곳은 조용하고 쓸쓸한 작은 섬으로 남았고 매년 소생하는 초목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호숫물 모습만 보일 뿐이다. 치경각은 세월의 흐름을 묵묵히 기록하고 있다.

    이화원의 재건을 위해 뇌정창은 온갖 심혈을 기울이었다. 그는 이번 재건을 가문의 명예를 다시 떨치는 시작으로 여겼다. 그는 그 어떤 곤란에 부딪치든지 모든 심혈을 양식뢰 가족의 기예를 황실 원림의 건설에 기울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였다.

    이화원 재건은 자희태후가 중용하는 순친왕 혁현의 중시를 받았다. 1890년 즉 이화원 재건공사가 시작돼 4년 후에 혁현이 사망했다. 혁현은 새로 건설한 황실 원림을 보지 못했다. 혁현은 황실 원림을 얼마 동안 건설해야 하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들 광서 황제는 한 차례 개혁에서 실패하여 자희태후에 의해 옥란당에 갇혔다. 혁현이 아들의 이익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이화원이 결국에는 아들이 옥살이를 하는 곳으로 되었다.

    혁현이 사망한 그해 경비 부족으로 해군 아문은 군함 구입을 중단시켰다. 1894년 7월 이화원 공사가 막바지 단계에 들어섰을 때 중일 갑오전쟁이 발발했다. 해전에서 진원호가 격침되고 초용호 양위호가 불이 달렸다. 이외 전투함은 격파되었거나 포로되었다. 1895년 2월 북양함대 전군이 전멸되었다. 이 해군 경비로 재건된 돌배만 여전히 곤명호 수면에 정박해 있었다.  1895년 3월 해전에서 실패한 1개월 후 해군 아문이 폐지되었다.

    같은 해 말 이화원 재건공사가 창졸하게 완공되었다. 오늘날 사료가 부단히 풍부함에 따라 청나라 역사 전문가들이 당시 이화원 50-60개 공사 명세서 및 재건에 투입된 경비 추정에 따르면 이화원 공사에 투입된 총 경비는 은 500만-600만 냥에 달했다. 이는 당시 군함 세 척을 만드는데 드는 경비에 해당된다.

    1886년부터 1895년까지 이화원 재건은 9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당시 국력이 쇠약해 뒷산 및 위치가 편벽한 곳의 건축물은 재건을 포기했지만 이화원은 여전히 청의원의 주체 모습을 보류했다. 만수산 동쪽의 인수전은 기존의 근정전으로부터 자희태후와 광서 황제가 정무를 보고 외교 사절을 접견하는 장소로 되었다. 낙수당 옥란당 등 건축물은 재건된 후 기능이 다소 바뀌어 제후의 거실로 되었다. 아울러 전통 사합원의 건축형식을 취했다. 새로 건설한 덕화원과 원사득궁정 생활 구역의 건축 밀도는 크게 증가되었다. 만수산 서쪽 산기슭의 청리관 화중유 등의 경관도 복원되었다. 곤명호의 남호도도 복원되었다. 청의원의 17공교도 새로 보수되었다. 만수산 앞 산 중부에 있는 건축물은 중점 재건 건축물로 되어 전부 재건되었거나 신축되었다. 1860년 대 재난에서 남은 보운각과 전륜장 건축군은 청의원 시기의 원 모습을 보류했다. 불향각은 화려하고 웅장한 황실 기백을 재현했다. 앞 산에서 변화가 가장 큰 것은 대보은연수사를 배운전으로 개축한 것이다. 배운전 건축군은 만수산 앞쪽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규모가 있는 한 세트의 건축물이다. 배운전과 불향각은 후세대 안목 중 이화원의 상징으로 되었다. 원림 전문가들은 이화원의 앞 산 한복판의 분포는 보다 엄밀하고 건축 풍격이 보다 뛰어났는데 이는 청의원을 초과했다고 인정했다. 

    건륭 연간 청의원은 세 면이 개방되었다. 단지 문창각에서 서궁문까지 담장이 둘러쌓였다. 하지만 이화원의 네 면은 모두 담장을 쌓았다. 이는 이화원이 단순한 관광지로부터 제후들이 주거하는 행궁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이화원은 자희태후가 가장 선호하는 정원으로부터 청나라의 정치 중심으로 되었다.

    1907년 이화원이 재건된 12년 후 뇌정창이 사망했다. 뒤이어 황실 원림을 건설해 명망을 떨친 뇌씨 가족도 점차 몰락하기 시작했다. 민국 연간 뇌씨 가족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설계 도면과 입체설계모형을 거의 다 팔았다. 따라서 대를 이어 전해진 기예도 최종 대를 끊게 되었다. 

    [안내]

    이화원 건설은 1895년에 완공되었어요. 이화원 총설계사 뇌정창은 저명한 건축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중국이 세계 문화유산 항목 중 매 5건 가운데 1건이 뇌씨 가족이 설계 건설했어요. 2007년 6월 20일 양식뢰 설계도면 서류는 세계 기억 유산에 입선되었다.

    양식뢰 모든 작품 중 중국에서 맨 마지막 황실 원림인 이화원이 양식뢰의 가장 뛰어난 기예를 대표할 수 있다. 아울러 이화원이 뇌씨 가족의 최후 한 건의 위대한 건축 작품이기도 했다.

    이화원 동궁 내에는 작고 여윈 해묵은 측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측백나무에는 100여년 전에 불에 탄 흔적을 똑똑하게 보아낼 수 있다. 나무의 원 줄기 3분의 2는 이미 죽어버렸다. 곁 가지에 새 가지가 자라났다.번역: 정봉길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4-04-14 1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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