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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화원 4부- 세월에 부대낀 꿈의 낙원

  • 입력 2014-04-14 11:11:38 | 조회 2645 | 추천 178
  • 출처 C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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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4부- 세월에 부대낀 꿈의 낙원

 [소개]

    이화원은 수건 당시 자희태후의 성대한 생신연을 위한 축제의 장소였고 태황태후, 황제가 지냈던 한적한 곳이였다. 또한 광서제가 연금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이화원은 당시 사회 안위를 보여주는 척도와 같아 황제와 태후 간의 권력다툼과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정권다툼을 여실히 보여주는 견증물이였다. 또한 원림 역사상 하나의 대동란을 경과했다.

    8국 연합군이 침략했을 때 자희태후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피난했다.

    당시 주군에게 무한한 영광과 환락을 선사했던 이화원은 황실 말엽의 몰락과 패배도 함께 겪어왔다.

    점차 멀어져 가는 낙원, 그 운명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본문]

    이화원 곤명호의 수목자친은 서태후 침궁인 낙수당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수목자친 앞쪽은 부두였고 서태후는 이곳 수로를 이용해 배를 타고 이화원을 다니곤 했다.

    드넓게 펼쳐진 이곳에서 저 멀리 바라보노라면 산새가 지저귀고 넘실거리는 물결사이로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에 어느새 자연의 산수화목에 대한 친절감이 감돌아 이 곳 이름을 수목자친이라 불렀다.     

    [가이드]

    현재 우리 위치는 이화원 지춘정입니다. 잠시 후 곤명호에서 북쪽으로 출발해 첫 목적지 수목자친에 도착하면 전등, 전화전시회를 관람합니다. 모두 저쪽을 보세요. 저쪽 기슭에 큰 기둥이 보이시죠. 옛날 자희태후가 이화원에 있을 때 바로 저 기둥에 아주 큰 가스등을 달았다고 합니다.

    [해설]

    백여년전, 수목자친 부두의 탐조등대에 큰 가스등 하나가 높게 달렸었다. 이 등불은 이화원을 제일 밝게 비추었는데 밤중에 등불이 밝아 있으면 자희태후가 아직 침실에 들지 않았다는 표시다. 자희태후가 취침하면 등불은 꺼지고 다른 하인들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자희태후는 독일에서 구입한 전등을 아주 좋아했는데 이 또한 그가 이화원을 사랑했던 원인 중 하나였다.

    이날 밤 이화원 등불은 환하게 밝아 있다. 태관과 궁녀들은 궁전과 회랑 사이를 분주히 드나들며 각양각색의 오색 천막과 채색등을 자금성 서화문에서부터 사십리 거리의 이화원 동궁문까지 부지런히 장식하고 있다. 밤새 도성에서 이화원에 당도한 왕공대신들과 푸진공주들은 이른 새벽 지춘정 부두에서 출발해 배운전 부두로 향하고 있다. 한 표문함이 배운전 2궁 문밖의 황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 함에 든 문서는 광서제가 자희태후에게 올리는 생신 축하 표문이다. 이 날은 1897년 11월 4일, 음력으로 십월 초열흘, 바로 자희태후의 63세 생신날이다.

    낙수당에서 취침한 서태후는 날이 밝자 일찍 기상한다. 그는 평소에도 6시면 일어난다. 그는 손, 얼굴을 곱게 치장하기 전에 절대 외출하지 않고 사람도 만나주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는 연지도 자신이 직접 제조했고 옷도 우선 그 디자인부터 마음에 들어야 했다.

    소주에서 일년에 만들어 보낸 옷만 135견지나 된다. 생신날에 입는 자주색 비단외투 한벌 만드는데도 4백~5백 가지 공이 든다. 이 피견은 새알 크기의 3500개 진주를 꿰어 만든 것이다. 자희태후는 매일 십여견지의 옷 중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데 매 장소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다. 아침 조정에서 한벌,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한벌, 오락을 즐기며 식사할 때도 한벌, 하루에 서너번은 갈아입었다고 한다. 만약 나비도안의 옷을 골랐다면 그에 따른 악세사리도 모두 나비도안으로 바꾼다.

    이화원 만수경전은 반년전부터 준비했다. 행사를 앞둔 한달 전, 자희태후는 이화원 축제에 참가할 왕공대신과 푸진공주의 명단을 작성하는데 이는 대신들에게 내리는 큰 영광이자 하례였다.

    그들은 연회를 앞두고 반드시 전문 예의훈련을 받아야만 8일간의 이화원 생신연 활동에 참가할 수 있었다. 연회에서 가장 주요한 활동은 자희태후를 배반해 8일간 대형 경극을 관람하는 것이다. 축하를 드리는 사람들로 구성된 희희양양한 흥성한 모습은 사실상 자희태후를 기쁘게 해드리 위한 생신연의 하나의 조성부분이였다. 자희태후는 예의범절를 아주 중요시했다. 특히 축제에서는 한점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황제와 황후도 시연에 참가하도록 했다.

    이화원 수건 당시, 자희태후는 회갑연을 치르기 위해 공사 진척을 다그치라는 의지를 내렸다. 그러나 1894년, 자희태후 회갑년에 중일 갑오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전쟁을 책임진 대신이 큰 잔치를 치르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자희태후는 대노하며 오늘 나를 노하게 한 자는 평생 그를 괴롭혀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게 된 청명군은 하나씩 철퇴하기 시작했고 조정의 쟁론도 끊이지 않았다. 자희태후는 하는 수 없이 이화원 행사를 즉시 중단시켰다. 결국 자희태후의 회갑연은 배운전에서 치르지 못하고 자금성에서 간단히 마쳤다.

    3년 후, 태평한 날이 언제 오려나 싶을 당시 독일군함이 또 교주만에 상륙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 자희태후는 만수경전을 위해 오늘 잔치를 치르게 된 것이다.

    자희태후 일행은 요월문에서 출발해 장랑을 지나 배운전으로 향했다. 자희태후의 이번 생신연을 위해 영국프랑스연합군이 태워버린 장랑이 다시 새롭게 수건되었다. 자희태후는 이곳을 산책하면서 풍경도 감상하고 장랑벽에 그린 채색화도 감상한다. 채색화는 중국 원림건축에서 중요한 장식수법이다. 장랑에 그린 채색화는 크고 작은 것 모두 합하면 1만 4천여폭나 된다. 그 중 유명한 소제춘효, 평호추월, 단교잔설 등 서호 풍경 외에도 산과 물, 꽃과 새, 그리고 인물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 자희태후의 애호에 맞춰 희곡문화 이야기도 많이 포함돼 있는데 이곳 채색화의 내용도 모두 자희태후의 의지에 따른 것이였다.

    연회가 정식 시작하기도 전에 만수산 앞산의 배운전 일대는 벌써 흥성이기 시작했다. 배운전 문밖의 길 양켠에 3품 이하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다. 배운전에 들어서면 양측에 옥화전과 운금전이 있고 궁전 밖의 금수교 양측에는 2품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다. 2궁문 안쪽에는 방휘전과 자소전이 있고 황후, 공주, 푸진, 명부 등 여자 권솔들이 절을 올리려고 대기하고 있다.

    자희태후는 낙수당에서 장랑을 지나 배운전 동측 개수당에서 가마를 내리고 연회를 시작하기 전 배운전 동난각에서 잠시 휴식한다. 배운전 뒷쪽은 덕휘전인데 덕휘전에서 동서 양측으로 펼쳐진 장랑을 파산랑이라 부른다. 그 산세를 따라 배운전과 각 배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배운" 이 두 글자는 진조 때 곽박의 시구 "신선이 나타난 곳에, 금은대가 보였으라" 에서 출현했는데 그 뜻은 운무가 피어오르는 산과 옥돌로 지은 누각에서 신선이 살고 있음을 비유하고 있다. 배운전을 핵심으로 한 이 전당은 이화원에서 가장 장엄한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배운전은 자희태후의 만수경전을 위해 새로 수건한 하나의 건출물이다. 자희태후는 배운전 보좌에서 오늘 처음으로 축복을 받는다.

    연회가 시작할 시간이 곧 다가온다. 왕공대신들은 이미 차례로 배운전 2궁문 안밖으로 정중히 대기하고 있다. 그들이 가져온 축하 예물은 벌써 이화원에 당도해 자희태후가 보기 쉬운 곳에 잘 배치했다. 전국 각지 기이한 보물들은 올해 초겨울 바로 이화원에 전부 집중된 셈이다. 이 백자도 병풍은 호광총독 장지동의 축하 선물로 황태후의 만수무강과 자손의 번창, 그리고 국가 조정의 끊임없는 발전을 뜻한다. 여의(如意)는 자희태후가 좋아하는 길상물로 생신예물로 빠질 수 없다. 정교한 서양시계도 자희태후가 제일 아끼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생동하게 만들어진 선인배는 사실 화장품을 담는 통으로 보기도 좋지만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선물 중 자희태후가 마음에 드는 것은 한동안 갖고 있게 되고 기타 한번 보지도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으로 주거나 창고에 둔다. 지금도 이화원 배운전의 동서 난각에는 자희태후에게 바쳤던 예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흠천감 관원이 길시를 알리자 배운전 내에는 북소리가 울려퍼졌고 천자의 위엄 있는 행차 행열에 이어 자희태후는 대전 중앙에 높게 모신 구룡보좌로 오르고 있다. 장엄한 악기 소리와 더불어 연회가 정식 시작되었다.

    배운전 보좌에 앉은 자희태후는 여유롭게 눈앞의 관경을 바라보고 있다. 자희태후의 성은 예허나라, 그는 16세 때 입궁해 함중황제의 란귀인으로 되었고 맏아들 재순을 낳고 의귀비로 승임됐다. 함풍제가 승아하고 재순이 동치제 보좌에 앉았고 황제의 생모도 황태후로 되어 존호를 자희, 이름을 서태후라 불렀다.

    동치황제에서 광서황제까지, 27세부터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해 그 후 독자 훈정까지 자희태후의 권력은 갈수록 강력해졌고 이름 앞에 붙이는 존호도 갈수록 길어졌다. 오늘날 태후의 명호는 "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성모황태후"이다. 모든 것을 소유한 자희태후였지만 하나의 소원만은 늦게나마 꼭 이루고 싶었다. 바로 자신의 심혈과 꿈이 깃든 원림에서 특별하고 성대한 생신연을 차리는 것이다. 4년이 지난 오늘 63세를 맞으면서 그는 드디어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게 되었고 청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한 여인의 위엄과 영광을 떨치게 되었다.

    이번 만수경전 이후, 예물 하나가 자희태후의 침궁 낙수당에 줄곧 보존되고 있는데 바로 뭇새들이 봉황의 뒤를 따르는 자수 병풍이다. 중국 전통문화에서 봉황은 지고무상의 신조를 가리키고 각종 뭇새는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봉황의 곁에서 그 위엄을 빛나게 해줄 뿐이다. 변함없는 권력을 상징해주는 이 병풍은 자희태후가 가장 아끼는 보배로써 황제를 대표하는 용도 이 봉황의 곁에서는 무색해진다고 한다. 전에 광서황제도 이화원에서 만수경전을 여러 번 차렸지만 그 규모는 어느 것도 자희태후 생신연과는 비교되지 못했다.

    [가이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곳이 청리관입니다. 이 정원 내에는 정전, 배전, 방원과 2층으로 된 희루 하나가 있습니다. 건륭황제가 늘 이곳에서 황태후를 모시고 경극을 관람했답니다.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도 모두 경극 애호가로서 그들을 위한 연극이 늘 이곳에서 펼쳐졌다고 합니다.

    [해설]

    청리관은 만수산전 서쪽에 위치해 있고, 장랑을 마주하고 서단에 자리한 청요정은 이화원 서부 점경의 중요한 건축이다. 청리관은 황색 꾀꼬리의 울음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정문 현판에 씌어진 글은 자희태후의 친필인 "금지수화", 그 출처는 "한서•예악지"로 악기의 화려한 장심 장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옛날 이곳에 많은 악사와 다양한 악기를 가진 화려한 황가 악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청의원 당시 희루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도록 좌북조남 형태로 지었고 곤명호와 마주 바라보게 했다. 왜냐면 한 나라의 군주였던 건륭황제가 가끔 황태후를 위해 자신이 직접 무대 위에 오를 때가 있었으므로 무대방향이 존귀함을 뜻하는 남쪽이어야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이화원을 수건하면서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모두 관중이었기 때문에 무대 방향을 남에서 북으로 향하게 형태를 바꿔 만수산과 마주하게 했다. 경극을 무척 즐겼던 자희태후는 정원 내에 또 대희루인 덕화원을 증설했고 자신과 함께 경극을 즐기는 것으로 그 사람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극에 문외한인 일부 대신들에게는 사실상 고된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그리고 대신들은 매번 극을 볼 때마다 태관에게 예물을 모아 바쳐야 했다. 왜냐면 정원 내에는 뒷간이 없으므로 작은 측문이라도 열어줄 것을 부탁해야만 대소변이 급할 때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화원 대희루가 건설된 후 청려관은 자희태후가 여름 더위를 식히는 피서지였다. 자희태후는 청려관 앞쪽 어조헌 서측 부두에서 배를 타고 호숫가 풍경을 감상하면서 외국인들이 하궁이라 부르는 이 황가원림의 최고의 경지를 흔상했다. 매년 음력 7월 15일, 중원절 때면 자희태후는 청량대에서 곤명호의 잔잔한 흐름과 투명하게 빛나는 연꽃등을 구경한다. 그리고 8월 15일, 중추절 저녁에는 청안방 혹은 만수산 중동측 경복각에 올라 호숫가 달빛 아래서 술잔을 비우곤 했는데 이는 자희태후가 이화원에서 즐기는 제일 좋은 휴식이었다.

    평일이면 자희태후는 이화원에서 글 쓰고 그림을 그린다. 자희태후는 늘 그림을 왕공대신에게 상으로 내리곤 했다. 하지만 자신의 회화수준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궁정 화가 류가혜의 그림에 자신의 옥쇠를 박아 전달했는데 하사받은 사람들도 그림의 원작자가 류가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희태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림에 대한 감상토론을 격렬하게 펼침으로써 한동안 자희태후의 그림은 청나라 상류사회 찬송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왕공대신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개된 비밀이 떠돌고 있었는데 바로 자희태후 그림의 진위를 판단하는 방법이었다. 만약 매화의 가지가 서로 교차해 능형이 된 그림은 자희태후의 작품이었다. 전문화가라면 이런 저급 착오를 범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지적해주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자희태후를 노엽혀서는 안됨을 사람마다 잘 알고 있었으며 광서황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광서황제 집정 당시, 황제가 비준한 중요한 상소문은 거의 모두 사전에 자희태후의 동의를 거쳐야 했으므로 겉으로 볼때 둘 사이는 아주 화친해 보였다.

    이화원은 자희태후에게 자금성에서 느끼지 못하는 쾌락과 편안함을 선사했다. 또한 이 원림은 국가의 안위을 말해주는 척도이기도 해 매번 자희태후가 정원에서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떠나야 할 상황이라면 아주 중대한 위기가 닥쳤음을 말해준다. 1897년 말, 자희태후의 63세 만수대전을 전후로 산동에서 조주 교안이 발생했다. 독일전교사 두명이 피살되면서 이 기회를 빌어 독일이 교주만을 점령했다. 그 뒤로 러시아에서 여순 대련을 점령하고 프랑스는 광주만, 영국은 산동 위해를 점령하면서 구룡신계 확충을 강박했는데 열강의 의도는 일본에 패한 청나라의 분렬을 노렸던 것이다.

    음력으로 무술년인 1898년, 조정에서 하나의 대 사건이 발생했다. 친정 10년간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광서황제는 서방사상을 주장하는 변법유신의 문인 강유위와 결탁해 혁신적 개혁을 시도했는데 중국과 황제의 운명을 개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개혁은 시초부터 자희태후의 반대를 받았다. 4월부터 9월에 이르는 사이, 광서황제는 자금성에서 이화원으로 가서 변법의 내용을 19번이나 상소를 올렸했지만 번마다 문밖에서 무릎 꿇고 자희태후의 호출만을 기다렸다. 어떤 때는 태관이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늦게 전달했는데 황제의 무릎 꿇은 모습을 우습게 여겨서였다.

    1898년6월 11일, 광서황제는 "명정국시조"를 발표하고 변법의 실시를 알렸다. 변법의 주요내용은 정부구조 개혁, 공상업 발전, 과거시험 폐지, 신학당 개설, 신문 창간, 언론 개방 등이였다.

    광서황제는 이화원을 찾아가 자희태후에게 몇부의 변법 상소문을 올렸다. 역사책에서는 자희태후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채 조정에서 진행하는 많은 유신자강의 일들을 듣고, 비평하고, 의논하고, 감탄했다고 했는데 모두 상소 내용처럼 명확하지는 않았다.

    자희태후가 기뻐하자 광서황제는 이 몇부의 상소문 내용을 대량으로 인쇄해 변법에 익숙하도록 왕공대신들에게 한부씩 돌렸다. 자희태후는 그렇게 하도록 응낙했다. 하지만 형세는 점차 불안정해졌다. 광서황제는 조급한 아이처럼 103일간의 이 짧은 사이에 무려 180여가지 각항 관련 신정조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정치 법령은 그 경중이 갈리기도 전에 사회 방방곳곳에 영향을 미쳤고 대부분 사람들의 이익을 건드려 갈수록 큰 난관에 부딪혔다. 그후, 개혁의 화두는 심지어 직접 자희태후를 공격하게 되면서 변법은 신속히 후당과 제당간의 살벌한 투쟁으로 번져져갔다. 9월 19일, 자희태후는 신속히 이화원을 떠나 자금성에 당도해 이틀후 수렴청정을 선포하고 광서황제를 유폐시켰고 변법인사들도 일부 감금, 살해됐거나 국외에 유망됐다. 그 뒤 무술변법이라 부르게 된 유신운동은 103일만에 실패를 선포했다. 다시 훈정을 시작하던 날 자희태후는 광서황제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를 20여년간 키워줬는데 어쩌면 다른 사람의 말에 동하여 나를 암살하려 했던가?" 이로부터 볼 때 자희태후는 자신의 조카인 광서황제의 배은망덕에 크게 분노했던 것이다.

    1899년, 이화원은 이 한해동안 아주 조용했다. 국세가 불안정해지자 자희태후는 자금성에서 정사를 볼 수밖에 없었고 정원을 산책할 겨를도 없었다. 1900년 봄에 자희태후는 드디어 이화원으로 왔다. 예전과 다른 것은 인수전에서 아침 조회를 열어야 했다.

    청의원 시기 인수전을 근정전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정사에 부지런했던 건륭황제의 태도를 의미했다. 후에 자희태후가 인수전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인수는 어진 정치를 하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이였다. 그 출처는 공자의《논어•옹야편》 "지자락, 인자수"에서 나온 이름이다. 인수전 주전과 남북 배전 그리고 인수문 밖의 구경방을 포함해 이화원의 정치활동구역이었고 그 당시 친정을 마친 광서황제가 정무를 보는 곳이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이곳 도처에서 자희태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인수전 밖의 월대 위에 남측과 북측에는 향을 피울수 있는 용봉(龙凤) 동상이 한쌍씩 있는데 용봉황상(龙凤皇祥)의 함의를 갖고 있다. 봉황 청동의 받침대에는 "천지일가촌"이라 새겨져 있다. 천지일가촌은 원명원 시기 자희태후 거처의 명칭으로서 그는 이것으로 함풍항제와의 지난날 사랑을 기념했다. 이 한쌍의 용봉 동상의 배열순을 보면 봉황을 중심으로 그 양켠에 용이 있다. 봉항은 고개를 우뚝 세우고 있고 용은 상체를 구부정했다. 이는 자희태후 시기만의 특유의 장식이다.

    이 태호석은 이화원 수건 당시의 예왕국 즉 지금의 베이징대학 장원에서 운반해 온 것이다. 태호석은 이곳에서 병풍과 비슷한 역할을 해 원림예술 중 작장경이라고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돌의 형태가 공수하고 읍하는 장수 노인과 흡사해 자희태후가 무척 아꼈다고 한다. 장수는 자희태후의 가장 큰 소원이였다. 인수전에는 자희태후가 친필로 쓴 장수 수자가 있고 보좌 뒤에 놓은 유리면 병풍에도 수자가 가득 씌여 있는데 그 개수는 모두 226개이다. 수자의 필법도 각양각색이다. 이 병풍도 자희태후의 의지에 따라 배치한 것이였다.

    광서황제 재위 34년간 중 그가 단독 친정한 시간은 10년밖에 안되였다. 이 10년 사이 그가 유일하게 진행했던 대사가 변법이였다. 1898년 6월 16일, 무술변법을 시작한 6번째 날, 광서황제는 인수전에서 강유위를 만나 2시간 가량 비밀담화를 했다. 이는 27세의 황제와 40세 개혁가 사이 유일한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 황제는 구룡보좌를 영원히 고별해야만 했다.

    이는 1900년 자희태후가 인수전에서 아침 조회 때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은 이연영, 왼쪽은 최옥귀이다. 보통 태관이 앞뒤로 호위하고 그 뒤로는 궁녀들이 줄지어 따른다.

    인수전 보좌에는 자희태후로 바뀌였고 이때 연금된 광서황제가 곁에 있는 임시 좌석에 앉았다. 가끔 자희태후는 광서황제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광서황제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대답해 무릎 꿇고 있는 대신들도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신들은 광서제가 태후의 의견에 모두 동의함을 알고 있었다. 이때로 부터 그들의 위치관계에는 다른 변화가 없었다.

    1900년 후, 자희태후가 이화원에 머물 때마다 옥란당에서 작은 북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황제가 답답함을 풀고 있는 것으로 태관들은 알고 있었다. 인수전 남쪽에 위치한 옥란당은 호수와 인접해 지은 아주 아름다운 건축이다. 건륭황제, 가경황제도 이곳 옥란당에서 정무를 보았다고 한다. 옥란당 동, 서쪽에는 배전이 있고 회랑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호수와 마주한 서쪽 배전인 적향사 사창 넘어로는 푸르름과 연꽃향이 가득하다. 이곳은 낙수당과 통한다. 동쪽 배전인 하분실은 인수전으로 통한다.

    1898년 9월 16일, 변법실패를 앞두고 광서황제는 옥란당에서 모두에게 잘 알려진 다른 한 인물을 만난다. 바로 북양신군을 통솔했던 직례안찰사 원세개이다. 면담 후 광서황제는 원세개를 후보시랑으로 승진시켰지만 눈치 빠른 원세개는 결국 자희태후를 보좌하는 한팔로 된다.

    무술변법이 실패하게 되자 광서황제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자금성의 중남해 영대에 유폐된다. 자희태후는 이화원으로 올 때면 황제도 함께 데려와 옥란당에 연금했다. 당시 옥란당 동서 두 배전 안쪽은 높은 벽으로 가로막혀 광서황제는 출입할 수 없었고 대문도 무겁게 닫혀있었다. 광서황제는 옥란당에 갇혀 황후도 맘대로 만날 수 없었다. 몹시 우울했던 광서황제는 늘 정원에서 작은 북을 두드리면서 마음속의 답답함을 해소했는데 그의 곁에는 측근 태감과 토끼 몇마리 뿐이었다. 원래 많은 질병으로 고생했던 광서황제는 정치적 타격과 정신상 고민으로 몸이 갈수록 허약해졌고 자희태후를 만날 때면 그는 긴장하고 불안해 안색이 더욱 어두었다. 자희태후는 제일 신임하는 어의한테 광서황제의 병치료를 맡기고 병환을 앓고 있는 사실을 천하에 알렸다. 옥란당 서재에는 각종 서방의 역사와 정치를 소개하는 서적들이 가득 진렬되어 있었다. 광서황제는 한때 영어학습에 열념한 적도 있었는데 이는 그의 마음속에는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금방 연금됐을 때 광서황제는 늘 방안의 물건을 깨부셨는데 이로써 자희태후의 주의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였다. 후에 방안에 부실 수 있는 물건들이 모두 옮겨졌고 일부 필요한 가구들만 남았다.

    황제에게 올리는 어선 표준도 질이 떨어져 하루 세끼에 열몇가지 요리라고 해도 수라상 가까이 놓인 음식은 이미 식은 지 오랬고, 멀리 놓인 음식에서는 심지어 지독한 냄새까지 풍겼다. 그러나 그 가까이 수선방(寿膳房)에서는 자희태후를 위한 어선이 건륭황제 때 태황태후의 두배로 성대하고 호화롭게 차려졌다. 날마다 정찬으로 120여 가지 요리가 나오고 수선방에서 만드는 후식만해도 400여가지나 된다. 정찬이 나오기 전에는 견과류, 신선한 과일, 밀과, 과자가 각각 4가지씩 나온다.

    지금은 당시 수선방의 정경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이화원 청려관 식당의 현대식 수락간에서 옛날 황가 어선의 기백과 호화로움을 느껴볼 뿐이다. 요리사가 자희태후 식단 중의 요리 "수성압방(寿星鸭方)"을 만들고 있다. 먼저 오리를 삶아내고 장소스를 뿌려 불에 굽는다. 그리고 고기를 반죽되게 다져준 다음 그 위에 새우살 한층, 호두 한층을 펴바르고 기름에 튀겨내면 "수성압방"이 완성된다.

    진지를 올릴 때 태감들은 차례로 들어오는데 우선 내시태감이 선함을 수라상에 올린 다음 요리를 올린다. 그리고 이련영부터 감식하고 나서 자희태후가 어느 요리를 바라보면 그 요리를 그의 앞에 놓는데 그는 간단히 맛만 본다. 이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법칙이다. 혹시 누군가 자희태후가 즐기는 음식에 손을 댈가봐 요리를 먹을 때 세입 이상 먹지 않는다.

    눈앞에 놓인 아름다운 요리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는다. 자희태후는 남은 부분을 여자 권솔들에게 상으로 내린다. 하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를 받들고 자희태후가 자리를 떠난 후 조용히 요리를 맛본다. 설사 그들은 이미 식사를 했더라도 식탁에 둘러앉아 자희태후가 하례한 음식들을 먹어야만 했다.

    이화원에서의 자희태후의 식사는 자금성에서보다 간단하고 편했다. 낙수당에 설치한 작고 정교한 상은 사실은 상 모양의 어항인데 작어탁이라 불렀다. 자희태후는 식사를 하면서 어항속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을 즐겨 보곤 했는데 이는 이화원에서만의 특유한 취미였다.

    1900년 여름, 이화원에서 제일 좋은 계절인 이 한 여름날에 이화원은 또다시 재난을 맞았다. 1900년 8월 12일 새벽, 8국연합군은 통주를 공략했다. 바로 그때는 중원절이였다. 이화원은 본래 도처에 등불이 환하고 밤마다 풍악이 울려야 했지만 이 한해는 호수면에 유리 연꽃등만 띄어졌고 야밤의 등불도 희미하고 참담해 보였다. 피서를 즐기던 자희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이화원을 떠나 급급히 자금성으로 향했다.

    1900년 8월 14일, 8국연합군이 베이징성을 전면 진공하자 베이징은 하루만에 곤경에 처해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어쩔수 없이 자금성을 떠나 서쪽으로 피난했다. 그날 이화원을 지키던 관원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수레 두대를 발견하고 다급히 가로막자 차에 앉은 사람이 태황태후라고 했다. 다같이 손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는데 한참 후에야 차안에 앉은 사람이 자희태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자희태후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한족 부녀의 옷차림을 했다. 자희태후 일행은 그늘 아래서 잠간 식사를 하고 나서 총망히 서쪽으로 도망갔다. 이로부터 일년간의 긴 망명생활이 시작됐고 이는 1860년 이후 청정부의 두번째 패배였다.

    8국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한 후, 이화원은 다시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화원 전등공소의 발전기세트와 전등설비는 모두 파괴됐고 수목자친 부둣가 탐조등대 위의 큰 가스등도 광명을 잃었다. 4년 후인 1904년에 이화원의 등불은 다시 밝았다. 바로 이 몇년 사이, 이화원은 외부에서 알 수 없었던 변화를 조용히 겪어왔다.

    번역: 함은희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4-04-14 11: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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