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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화원 5부 - 금원에서 외교를 연출하다

  • 입력 2014-04-14 11:14:17 | 조회 2134 | 추천 221
  • 출처 C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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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화원 5부 - 금원에서 외교를 연출하다

 

【소개】

    기원1900년,8국연합군(八國聯軍)이 의화단(義和團)을 진압한다는 명의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침략했다.이화원도 재난을 겪었다.

    1901년,청나라 정부는 주권을 잃어 나라를 욕되게 하는 망국의 ‘신축조약’을 체결했다.자희태후도 피난을 마치고 시안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국력이 점점 쇠퇴되고 국방이 날로 박약한 정황에서 청나라 조정은 오직 외교역량에 의지해 국가의 운명을 바꿔보려 희망할수 밖에 없었다.

    1902년부터 시작해 황가원림 이화원에서 자희태후는 일련의 외교활동을 전개했다.칼이라고 부르는 미국 여화가는 자희태후의 화상을 그려주기 위해 의화원에서 9개여월이나 머물렀다. 그는 자희태후 그리고 이화원과 유례없는 밀접한 접촉을 했다.그가 그린 자희조복상은 제2회세계박람회에서 히트를 쳤다.그러나 중국대표단이 세계박람회에서 번드르르하게 모습을 드러낸것은 청나라 멸망전의 최후의 순간이 되고 말았다.

    【정문】

    매일, 수많은 관광객이 이화원의 각 관광명소앞에서 사진을 남겨 기념으로 한다.

    기원 1900년의 한여름, 황가원림 이화원안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각 관광명소앞에서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그들은 만수산앞에서 득의양양했다. 그들은 연잎으로 만든 차양모자를 쓰고 칭안방(清晏舫)에서 시원한 바람을 쑀다. 그들은 곤명호에서 발가벗고 목욕을 했다. 그들은 호기심에 차 매 건축을 관상한후 이를 파괴했다. 그들은 많은 문물을 약탈해갔다. 가지고 갈수 없는 것들은 당장에서 훼손시켰다. 그들은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과 오스트리아에서 총포를 들고 온 불청객이다. 그들의 공동한 이름은 8국연합군이다. 재차 원림을 소각하지 않은 외에  그들은 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칭이웬에서 한 모든 악행을 거의 재연했다. 러시아, 영국과 일본군대는 그 후 이화원에서 1년여란 시간을 주둔했다.

    1901년은 음력 신축년이다. 이 해 가을, 자희태후의 ‘중화의 물력을 헤아려 체결국의 환심을 사라’는 지시에 따라 청나라 정부는 외국열강들과 ‘신축조약’을 체결했다. 최종 4억5천만냥 백은과 갖은 망국의 조항을 대가로 8국연합군은 베이징성에서 철수했다.

    1901년가을,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시안에서 피난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로서 중국은 1년여간의 무정부상태를 마쳤다. 자희태후와 광서황제가 베이징에 돌아오기 전야에야 러시아인들은 이화원에서 철수했다.  그들이 떠난후 이화원에는 심지어 하나의 온전한 유리조각도 없었다.자금성동남쪽의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교민항을 베이징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대사관구역이라고 부른다. ‘신축조약’체결이후 이곳은 중국인의 진입을 금지하는 ‘나라안의 나라’로 되었다.

    1902년10월, 이곳에 주재하는 각국 대사관에서는 갑자기 청첩장을 받았다.각국의 외국사절과 부인을 초청하여 자희태후를 알현한다는 것이였는데 장소는 바로 황가원림- 이화원이었다. 초청을 받은 외국사절과 부인들은 우선 유쾌한것이 아니라 불안했다. 2년전에 폭발한 의화단운동에서 자희태후는 의화단에 대한 태도가 포위하여 토벌하던데로 부터 지지로 돌연히 바뀌었다. 게다가 청나라 군대에 대사관구역을 포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청나라 군대의 대포는 서양인들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했다. 당시 서양인들은 동교민항의 교회당에 숨어 하느님의 보우를 구걸했다.그러나 끝내 그들을 구한것은 하느님이 아니었다. 자희태후의 태도가 갑자기 재차 바뀌어 청나라 정부의 보호아래 서양인들은 치명적인 재난을 면하게 되었다. 당시의 경력을 회상해볼때면 그들은 지금까지도 놀란가슴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 외국사절과 부인들의 눈에는 자희태후가 괘심할뿐만아니라 또한 무서웠다. 게다가 행동도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 신비한 황태후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는 과연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황가원림으로서 그 당시의 이화원은 아직 외국사절과 부인을 초청해 진입한 선례가 없었다. 그러나 1902년 늦가을, 국문이 열려 침략자들이 남겨놓은 잔존흔적을 대충 정리한후 자희태후는 외국사절과 부인들에게 자기의 집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공식적인 알현의식은 인수전에서 거행했다. 이화원 동궁문으로 들어와 인수문을 건느면 바로 인수전에 도착한다. 이곳은 자희태후와 광서황제가 정무를 보는 곳이다. 이날, 외국사절과 부인들은 마침내 직접 자희태후의 신성한 얼굴을 볼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알현한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미국인 허란더는 이렇게 묘사했다.우리는  이 보좌에 앉은 장엄한 여성이 표준적인 여황제란것을 진심으로 느꼈다.그의 밝고 빛나는 눈동자는 마치 우리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우리는 며칠전의 분노정서를 잊고 그의 존엄있는 거동과 환경이 유발한 경외심을 느꼈다. 저도 몰래 제후들을 알현할때 하는 절을 했다. 알현의식은 겨우 짧디잛은 8분간이었다. 그후 인수전의 곁채에서 연회를 열었다. 자희태후는 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황후와 여관들이 책임지고 접대했다. 그러나 손님들은 이미 풍성한 연회석과 준비한 세부사항에서 자희태후의 환대와 친절을 읽을수 있었다.식탁에는 이외로 서양식의 식기와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이는 외국사절부인들로 하여금 자희태후가 전하는 말처럼 인정없는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느끼게 했다.

    비록 이번 활동이 외교식의 인사치레와 격식이었지만 아무래도 이화원중의 아름다운 경치와 풍성한 연회는 서양인들과 자희태후사이의 연무를 가셔준것 같았다. 이밖에 무엇이 이것보다 더욱 황태후 패하의 갈망과 외국인들의 염원을 표명할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화원에는 이와 유사한 알현과 가든파티가 더욱 빈번하게 전개되었다.

    1901년이후, ‘신축조약’의 규정에 따라 청나라 정부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외무부로 개편했다. 외국열강들은 외무부를 통해 더욱 간편하게 중국에다 자기의 의지를 주입하길 희망했다.

    청나라 통치자들도 외교사무가 이미 국가의 생사존망에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자희태후는 몸소 실천해 각색의 서양인사이를 주선했다. 그리고 일부 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귀족자제들도 이화원 외교활동의 참여자가 되었다.

    프랑스주재 중국공사 유경의 두 딸 덕령과 용령은 장기간 외국에서 생활해 외국어를 정통하고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았다. 중외 궁정예의에도 익숙했다. 자희태후는 소식을 듣고 즉시 두 자매를 이화원에 불러들여 자기와 서양인들의 내왕에 편리하도록 했다. 덕령과 용령은 이화원에 신선한 서양바람을 가져왔다. 자희태후는 그들이 선물한 프랑스화장품과 향수를 가장 좋아했다. 또한 두 자매에게 서양식 긴 치마를 입고 서양악기를 치게 하고 서양무용을 추게 하였다. 그는 언제나 빙그레 웃으면서 구경했다.

    서양인들의 방문을 접대하기 위해 이화원 전당내에는 서약식 샹들리에(吊燈)를 설치했다. 그러나 덕령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국제독을 접견하기 전야에 자희태후는 명령을 내려 악수당내 탁자위의 옥불을 치우게 한것이다. 이는 성결한 물건으로서 서양인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 된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옥이 더럽혀 질가 두려워서였다. 나한이 찍힌 문발도 서양인들이 보면 불길하다고 떼어내게 했다. 화장대도 채워 놓았다. 자희태후는 또 덕령과 용령자매에게 외국사신과 그들의 부인 앞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런 거동은 자희태후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상태를 시사한다. 어쩌면 그와 외국인들의 내왕은 처음부터 체념이었고 피동적이었으며 외교필요에서 나온 일종의 희생이였는지도 모른다. 외국손님들은 끊임없이 이화원을 드나들고 심지어 그의 청나라 황태후의 침실까지도 들어가 참관했다.후에 자희태후는 이런 서양인들의 행동거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어떤 부인들의 행동거지는 매우 적절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우리 중국인들을 그닥 존중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쉽사리 발견했다. 잘난체 하고 문명한체 하고 교양있는체 하는 그들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볼때 중국인들이 그들보다 많이 문명했고 행동거지도 신분에 더욱 걸맞았다.

    접견활동이 빈번해지자 조정에서는 이화원동문외에다 전문 외무부공소를 설립했다.

    ‘기거주’의 기재에 따르면 광서 28년에서 부터 광서34년에 이르는 5년간, 자희태후는 매년 이화원에서 외국사신을 적어서 몇차례 많아서 10여차례 접견했는데 가장 많을때 98명을 접견했다. 이화원은 자희태후가 가장 좋아하는 황가원림으로부터 청나라의 가장 중요한 외교무대로 변신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중화민족으로 하여금 백년의 꿈을 이루게 하였다.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1백년전 이화원에서 한 하나의 결정으로 중국인들이 예전에 올림픽과 지척에 있었다. 1904년,5백명으로 구성된 방대한 중국대표팀이 미국의 도시 세인트루이스에 출현했다.이해에 제3회올림픽과 제12회세계박람회가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그 당시,금방 생겨난 올림픽은 지금처럼 인기가 없었다.올림픽은 세계박람회의 한개 부속항목으로 거행됐다.중국은 이번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그러나 푸룬왕자를 단장으로 하는 방대한 대표단을 같은 도시에서 개최하는 세계박람회에 파견했다.게다가 1백7지만용원(一百七址萬龍園)의 거금을 들여 민족풍격이 짙은 중국전시관을 건설했다.이번 세계박람회에서 중국대표단의 표현은 세인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중국전시관이 상당한 호평을 얻었을뿐만아니라 어떤 전시품은 금상까지 받았다. 마침 내우외환을 겪던 청나라 정부에서 인력, 물력을 아끼지 않고 세계박람회에 번드르르하게 선보인 것은 절대로 한시기 흥기해서가 아니다.

    ‘신축조약’체결이후 중국의 경제는 날로 쇠퇴하고 국방도 점차 박약해졌다. 호시탐탐하는 열강들을 직면해 청나라 통치자들은 오직 외교역량에 의지해 국가의 운명을 바꿔보려고 할수 밖에 없었다. 이화원외교활동이 처음으로 성과가 보이기 시작할때 제12회세계박람회의 개최는 또한 이 정책의 진일보한 실시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그래서 당시 중국의 정치중심 이화원에서 자희태후는 친히 세계박람회 참가 결책을 내렸다. 그는 심지어 자기를 선택하여, 이 제국중의 가장 존귀한 사람을 선택하여 국가형상대변인을 맡았다.

    미국사절 캉거의 부인은 여러차례 이화원을 갔었다. 자희태후에 대해 매우 익숙했으며 심지어 숭배한다고 해야 했다. 미국인들로 하여금 이 중국의 여황제를 요해하게 하기 위해 캉거부인은 자희태후의 초상화를 그려 세계박람회에 전시해달라고 요청했다.중국에서 가장 존귀한 여성으로서 화상은 본래 쉽게 다른 사람에게 보일수가 없었으며 더욱이 서양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외교의 필요에 의해 자희태후는 하나의 유례없는 결정을 내려 캉거부인의 건의에 동의했다. 게다가 미국에서 온 여화가 캐슬린 칼을 열정적으로 접대했다. 이화원옆에 칼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화상을 완성하기 위해 칼은 이화원에서 근 10개월 머물렀다. 외국인으로 놓고 말하면 오직 그뿐이다.

    기원 1903년8월7일, 미국화가 칼이 이화원에 왔다. 이날은 자희태후가 지정한 길일이었다. 칼은 훗날 회억록에서 이화원에서 그의 경력을 상세하게 묘사했다.이화원입구에서 나는 붉은색 커버가 달린 궁정가마를  바꿔 앉아 이 신비한 궁전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가마에 들려 각양각색의 정원과 화원을 지나 하나의 비교적 큰 장방형의 정원에 왔는데 안에는 진귀한 개화식물과 많은 멋진 관목들이 가득했다. 이 정원이 바로 자희태후의 침궁 악수당이었다. 칼이 본 멋진 식물은 옥란, 해당화와 모란꽃이였는데 의미는 ‘옥당부귀’(玉堂富貴)를 뜻했다. 악수당정원군은 남쪽으로 곤명호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만수산을 기대고 있는데 이화원생활구에서 최대의 정원이었다. 악수당원내에는 전후 두 진원(進院)과 동서 두 과원(跨院)이 있는데 크고 작은 방이 모두 49칸이 있고 전부 복도로 연결되었다. 원내의 동서 곁채에는 10칸의 방이 있는데 여관들의 침실이다. 후원에는 한줄의 9칸짜리 북방이 있는데 자희태후가 귀중한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악수당 동쪽의 편원은 영수재라고 부르는데 총괄대신 이련영의 거처이다. 서쪽 담장의 이 작은 문은 악수당으로 통해 이 충실한 노복이 제일 빠른 속도로  부르자 마자 달려오도록 했다.악수당대전은 수목자친부두 뒷쪽에 위치해 북쪽에 자리잡고 남쪽을 향한다.대전의 앞에는 한쌍의 동록, 한쌍의 동학과 한쌍의 동병을 설치해놓았는데 그 독음을 따서 의미는 ‘6합태평’(六合太平)을 뜻한다. 유리문 뒷쪽은 이 침궁의 원채이다.

    악수당 원채내의 한가운데는 황태후의 보좌가 놓여있고 보좌의 앞에는 카펫을 깔아놓았으며 주위에는 향로를 안치했다. 보좌의 뒷쪽은 12개유리칸막이로 구성된 병풍이 있었고 보좌 양쪽의 큰 사기쟁반에는 예전에 매일 신선한 제철과일이 담겨져 있었다. 이 과일은 먹는 것이 아니라 궁전에 냄새를 피우는 것으로 과일향기를 맡는 것이다. 듣는말에 의하면 자희태후가 매년 궁전에 냄새를 피우는데 사용한 과일이 4만킬로그램이나 되었다.

    악수당의 서쪽 스위트룸은 자희태후의 침실인데 침실의 서쪽벽에는 도금한 수자를 새긴 큰 유리거울이 걸려있다. 곁에는 밝은 황색이 나고 장식이 화려한 온돌침대가 한쪽을 차지하고 침대곁에는 4각이 나고 바퀴달린 서양식 소파가 있었는데 비단면의 자수는 동방풍격의 난화였다.거울아래의 탁자에는 서양인들과 대신들이 진상한 서양시계와 장식품들이 놓여져있었다. 자희태후는 시계를 좋아했는데 기재에 따르면 악수당에는 도합 85개의 시계를 설치해놓았으며 침실에도 몇개나 설치해 놓았다. 이상하게도 이런 시계의 시끌벅적한 소리속에서 자희태후가 어떻게 편안하게 잠들수가 있었을까? 나는 갑자기 들이 닥친 침묵에서 낌새를 알아채고   황급히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다. 여리고 귀여운 귀부인이 만면에 희색을 짓고 걸어나왔다. 황태후의 미소는 나를 완전히 정복했다. 나는 저도몰래 그의 우아한 손가락을 자기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는 예의에 없는 것이었다. 이는 내가 예상을 벗어난 그의 매력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찬미였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때 전내의 85개의 시계가 85가지의 소리로 시간을 알렸다. 오전 11시 정각, 그림을 그릴 길시가 되었다. 아마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렇게 방자하게 청나라의 지고무상한 황태후를 관찰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지구의 다른 한 쪽에서 온 미국인이 말이다.

    나는 목탄필을 들고 이 중국 황태후의 평생 첫 초상을 그릴 캔버스에 첫자국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은 모두 쥐죽은 듯이  주위에 서서 나의 매하나의 동작을 예의주시했다. 황태후와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모두 장중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각 잠깐, 85개 시계의 가장 경미한 똑딱소리도 마치 대교회당의 종소리처럼 나의 귀전에서 굉음을 냈고 목단필이 캔버스에 움직이는 소리도 대형 톱으로 목재를 켜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행운스러웠던것은 나의 흥미가 솟구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그림대상과 나의 일 외에 나는 기타의 모든 것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첫번째 화상을 제작하는 시간은 그날 점심까지 지속됐다. 자희태후는 마치 화상을 빨리 완성하는 것을 그닥 따지지 않고 칼이 이화원내의 일체를 향수하도록 하는데 더욱 열성적인 것 같았다. 당일오후,자희태후는 칼을 요청해 덕화원에서 경극을 관람했다. 악수당에서 이 복도를 따라 가면 직접 악수당 동측의 덕화원에 도달할수 있다. 이런 복도는 악수당과 원내의 각 주요 건축들을 모두 연결시켰다. 그리하여 자희태후가 외출 할때 해빛에 쬐고 비에 젖을 근심 할 필요가 없었다. 덕화원내의 큰 연극무대는  높이가 21미터에 달하고 도합 3층으로 되었는데 복(福), 녹(祿), 수(壽) 3개무대라고 부른다. 1층은 인간, 중간은 신도, 상층은 선경을 뜻하며 1층 밑에 또 한층이 있었는데 지옥에 비유했다. 무대에서 하늘, 땅, 인간 부동한 공간의 정경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었다. 무대의 중심에는 윈치로 견인하는 밧줄이 상하에 관통되어 밧줄을 배우의 몸에 묶어 배역으로 하여금 손쉽게 하늘과 땅을 오가게 했다. 내부의 기계를 오래동안 보수하지 않아 이런 기묘한 정경을 지금에는 재현할수 없다. 내가 연극무대의 구조를 관찰할때 태후는 분명 나의 행동을 주의했다.그는 황실특별석의 계단을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친히 무대의 계단에 올라 나에게 그를 뒷따르라고 했다. 우리는 무대를 가로 질렀다. 태후는 나에게 위의 두층을 참관할 것을 건의했다. 이 두층은 중국민간의 극장에서 유행되지 않았다. 제2층에 오르고 여기에서 제3층에 오르는 계단은 모두 배경뒤에 있었다. 태후는 친히 걸어서 올라갔는데 그가 가파롭고 걷기 힘든 계단을 디딜때 젊은 나처럼 수월하고 건강하고 힘있게 보였다. 태후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당신이 좋은 중국무대를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큰 무대의  맞은 편은 의락전으로 자희태후가 연극을 관람하는 곳이다. 보좌는 의락전의 한가운데 설치했다. 그때 궁중의 경극공연은 늘 한번 공연하면 며칠씩 하군 했다. 연로한 자희태후는 각종 편한자세를 선택 할 수 있는 안채 창문곁의 온돌침대에 누워 연극 보기를 좋아했다. 자희태후는 연극보기를 열애했는데 표현이 출중한 배우에게는 푸짐한 상금을 주었을뿐만아니라 심지어 관작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 이곳에 와 공연하는 극단에서도 모두 암묵적으로 하나의 원칙을 준수했다. 그것은 모든 극에서 나오는 태후는 반드시 정면형상이어야 했다.

    자희태후의 애호는 경극의 번영을 크게 촉진시켰다. 덕화원도 당시 중국에서 가장 흥성한 대무대로 되어 당시 유명한 양웨러우, 탄신페이등 많은 명배우들도 모두 이곳에서 공연했었다. 중국희곡을 모르는 칼도 무대의 교묘한 설계에 탄복하였으며 그런 뛰어난 충격력을 가진 색깔, 소리와 조형도 칼을 신선하게 했다.

    중국황실의 황궁 금원에서의 생활은 신비한 색채를 띠었기때문에 국민들이 동경했을뿐만아니라 서양인들의 강렬한 호기심도 유발했다. 이런 비밀을 탐색하는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1904년 중국이 세계박람회에 참가할때, 주최측에서는 청나라 황실 안채를    

    배치해 관중들에게 참관시킬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제후의 심궁내정은 외국인에게 전시하기 불편했다. 대표단 단장 푸룬왕자는 노심초사끝에 하나의 총명한 해결방안을 찾아냈다. 바로 자기 집의 거실과 침실을 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영문신문들은 대서특필했다. 푸룬왕자주택의 화려한 복제품은 영국과 벨기에 전시구 사이에 위치했는데 비스듬히 가파른 지붕은 네 귀가 우로 치치고 색채가 눈부셨는데 박람회에서 동방건축의 멋진 견본이었다. 하나의 페이즈(贝子)주택의 복제품에 외국인들이 경탄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청나라의 체면을 많이 올려주었다. 이로부터 자희태후가 이화원의 교묘한 건축과 아름다운 경치로 미국화가 칼을 정복하려한 마음을 쉽게 읽을수가 있었다.

    곤명호는 이화원의 3/4면적을 차지했다. 여름에는 연꽃이 피어 경치가 사람을 매혹시킨다. 칼은 자희태후의 유람선에 오르는 행운을 누렸다.   배는 도크에서 나와 일찍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수목자친부두(水木自亲码头)에서 배에 올랐다. 자희태후는 먼저 배에 올라 황색의 보좌에 앉았다. 황후, 공주와 여관들도 모두 배에 올라 옆에 있는 방석에 앉았고 내시들은 서서 배를 저었다. 우리는 호수 수면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면서 다시 머리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궁전, 패방, 사찰이 있는 산, 기이한 옥대교, 호수가운데 솟아난 아름다운 한백옥마루 정말로 선경같았다. 자희태후는 늘 칼의 화상 제작을 중단시키고 그를 요청해 함께 산책하고 유희를 놀았다. 칼에 대한 자희태후의 태도도 그의 외교정책처럼 동요되었다. 한면으로는 너그럽게 주인의 도리를 다했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시종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자희태후는 심지어 덕령에게 몰래 칼의 행동을 감시하라고 당부까지 했다. 여하를 막론하고 칼은 조금도 제한없이 이화원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감상했다.

    부동한 원림경치에서 칼은 서양유화와 방법이 다르지만 같은 효과를 내는 색깔과 구도를 적지 않게 발견했다. 또한 중국원림예술과 중국회화의 일맥상통한 구도, 예술적 경지와 운치를 생생하게 느꼈다. 자희태후는 보좌에 앉아 모사하는데 쉽사리 흥취를 잃었다. 이때 그는 서양에서 온 사진술에 빠져있었다. 당시의 사진기는 민첩하지 못해 앵글을 맞추고 구도를 할때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데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현상이 많았다. 1903년부터 1906년까지 자희태후는 도합 786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중 대부분은 풍경이 수려한 이화원에서 촬영한 것이다. 자희태후는 자기를  관세음보살로 분장하길 가장 좋아했다. 마치 그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부처(老佛爷)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같았다. 서양에서 온 신선한  장난감에 대해 자희태후는 시종 호기심이 많았다. 1902년, 자희태후가 시안에서 베이징에 돌아온후 이화원에 첫 황실전화전용선을 설치했다. 자희태후는 또 승용차를 선물받았다. 전하는데 의하면 웬스카이가 생일축하선물로 진상한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땅히 중국의 첫 수입제 승용차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자희태후는 기사가 자기의 앞에 앉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여겨 기사를 무릎꾾고 차를 몰게 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조종할수가 없어 이 승용차는 다만 장식품이 되고 말았다.

    1904년,자희태후는 이화원에서 자기의 70세 생일 축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때 일러전쟁이 폭발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중국의 땅을 쟁탈하기 위해 중국의 동북에서 대판 싸웠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일본정부의 요구에 응해 중립을 엄수한다고 선포했다. 자희태후의 50세 그해에 중프해전이 폭발하고 60세때 중일 갑오전쟁을 맞았으며 70세에 또 일러전쟁을 맞았다. 이는 자희태후를 매우 불쾌하게 했다. 그는 서양인들이 안면을 봐주지 않아 매번 자기의 생일도 즐기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매우 증오했다. 일러전쟁이 끝난후, 원래 러시아에게 강점당한 중국영토를 모두 일본에 떼어주었다. 

    이 ‘영화호’작은 기선은 일본인들이 자희태후에게 선물한것으로 청나라 정부가 일러전쟁에서 일본에 협력한 것에 대한 답사였다.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한것은 청나라 관원들로 하여금 하나의 결론을 얻게 하였는데 이는 입헌국이 전제국에 대한 승리였다.

    1905년, 자희태후는 5대신을 외국에 파견하여 군주입헌제를 고찰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혁명당인들은 철저하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런 개량 자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9월24일, 5대신이 앉은 열차가 혁명당인에 의해 폭파되었다. 9월25일, 5대신중의 3대신이 이화원에 가 자희태후에게 이 일의 경과를 보고했다. 자희태후는 듣고 나서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그가 유일하게 할수 있었던 것은 이화원의 담장을 높이 쌓는 것뿐이었다.

    현재, 사람들은 높이 쌓은 담장에서 아직도 이 뚜렷한 흔적을 보아낼수 있었다.  이화원에서 9개여월 보낸 칼은 자희태후를 위해 도합 4폭의 화상을 제작했다. 이는 가장 일찍 완성한 자희태후 조복상이다. 이  화상은 기교가 섬세하고 색채가 풍부했다. 그러나 한가지는 서양유화와 달랐다. 서양화법에 따르면 인물의 얼굴은 마땅히 광선이 비추어 조성한 명암대비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자희태후는 얼굴의 음영이 절반 검고 절반 희면 마치 음양얼굴 같다며 중국유화보다 못하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화상을 끝내 현재 이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자희태후화상은 1904년 미국세인트루이스의 만국박람회에 보내졌다. 화상 전시후 구경꾼들이 조수처럼 몰려들어 세계박람회의 인기 뉴스로 되었다.  그후 자희태후조복상은 청나라의 예물로 미국정부에 증정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백악관에서 성대한 접수의식을 거행했다. 이 화상의 원본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국 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자희태후화상이 외국인들에게 찬사를 받던 날은 바로 청나라의 통치가 불안정하던 때였다.그리고 중국대표단이 이번 세계박람회에서 누린 영광도 청나라가 세계에 남긴 최후의 모습이었다.

    1908년,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 이화원은 풍모가 여전하여 왕조의 마지막 사명을 맡고 있었다. 7월24일은 광서황제의 만수축전으로서 그는 관례에 따라 이화원에서 축하를 접수하고 덕화원에서 자희태후를 수행해 연극을 관람했다. 10월12일, 광서황제와 자희태후는 인수전에서 미국공사를 접견했다. 이는 청나라 정부가 이화원에서 거행한 마지막 정무활동이었다. 한주일 후, 자희태후와 광서황제는 예년처럼 이화원을 고별하고 서원으로 돌아갔다. 바로 지금의 중남해이다.그후로 다시 이화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08년 11월14일, 38세의 광서황제는 붕어했다. 하루 후, 74세의 자희태후도 세상을 떠났다. 3세의 푸의가 청나라의 마지막 왕위계승자로 되었다. 1908년 12월19일,룽위황태후는 의지를 내려 황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 일시에 이화원에 갈수 없으므로 청황실은 이화원에 대한 여행을 중단한다고 명확히 선포했다.

    이화원은 계속 신비함을 유지하고 있다. 세인들은 여전히 자희태후, 그리고 이 최후의 황가원림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으로 가득찼다.

    번역: 진종호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4-04-14 11: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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