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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화원 6부 - 세상의 풍파가 문명을 이어가다

  • 입력 2014-04-14 11:16:48 | 조회 2160 | 추천 192
  • 출처 C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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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이화원 6부 - 세상의 풍파가 문명을 이어가다

 

【소개】

    자희태후가 별세한후 황후들은 더는 이화원을 광림하지 않아 이화원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청나라 말대 황제 부의가 퇴위한 후 이화원은 계속 청황실의 사유재산으로 되어있었다. 조건이 딸린 개방, 입장권을 받은 개방, 공유로 했다가 사적소유로 되돌려주고, 등 여러차례의 곡절을 겪은 후 1928년 7월 1일, 이화원은 정식으로 황실정원으로부터 국가공원으로 되었다.그러나 사회의 동란과 국력의 쇄락으로 말미암아 이화원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1949년, 해방군이 이화원을 인수했을 때 장부에는 이십전 밖에 없었다. 60년 후인 지금, 이화원은 경치가 아름다워 유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청의원시절 만수산에 탑을 짓다가 뜯어버리고 불각을 지은 일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데 오늘의 불향각은 새로운 휘황한 역사를 담아서 전해가고 있다.

    【정문】

    【이화원•동궁문】

    아침 6시, 이화원은 조용하고도 상서로운 가운데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동궁문은 이화원의 정문이다.

    여섯 개의 주홍색 대문 위에는 가로로 각기 아홉 개의 도금한 둥그런 못을 끼워 넣고 문 위에는 광서황제가 쓴 “이화원”이라는 금색문자 큰 편액이 걸려 있고 문 앞 기둥길 단폐에는 두 마리의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도안이 조각되어 있다.

    이는 건륭 년대의 유물이다.

    1937년 원명원 안유궁 폐허에서 여기에 옮겨온 것이다.

    용은 황제의 상징이다. 당년에 중간의 대문으로는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현재 매일 이곳으로 원림에 진입하는 유람객은 평균 몇 만 명에 달한다.

    건륭황제가 청의원을 건설한 때로부터 이 오랜 원림은 2백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여기에 드나든 역사는 80년 밖에 되지 않는다.

    1924년, 이미 퇴위한 청나라 말대황제 부의는 여전히 자금성 후궁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해 초의 어느 날, 부의는 갑자기 황후와 함께 이화원을 둘러보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을 내무부의 관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런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08년, 3살 난 부의가 등극한 후 융유 황태후는 조서를 내려 황제가 이화원에 놀러 다니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화원의 건축과 진렬품들은 봉인을 붙인 대로 보관하였다. 그 후 방치된 원림은 갈수록 황폐해지게 되었다.

    다만 소수 서양인과 고관들만이 이화원에 드나들 수 있었다.

    1911년의 신해혁명은 청나라 황제를 폐위시켰다.

    하지만 황실의 우대조건에 따라 부의는 여전히 자금성 후궁과 이화원의 주인으로 남아있었다.

    1913년 4월 24일부터 이화원은 제한적으로 대외에 개방되었다.

    각계의 저명한 인사들과 고관귀인들이 민국정부 유관부문의 비준을 거쳐 출입증을 발급받은 후 청나라 황실 내무부에 통지해야 만이 원내에 진입할 수 있었다.

    【민국초기 이화원 출입증】

    개방일은 매월 음력 끝자리 6일인 날과 양력 일요일이었다.

    당시 이화원에 진입하는 것을 참관이라도 유람이라고도 하지 않고 첨앙한다고 하였다.

    최초의 규정에 따르면 이화원을 첨앙하는 인원수를 각계에서 10명으로 제한하였다. 하지만 부녀계에는 통행증을 발급하지 않았다.

    후에 부녀계에서 강렬하게 반대하였기에 여성들도 음력 매월 6일에 참관할수 있게 하였다.

    1년 후, 1914년 5월 6일, 황가원림 이화원은 사회에 표를 팔고 개방하였다.

    비록 부의가 3살부터 이화원의 명의상의 주인이었지만 1924년 19살이 되어서야 그는 처음으로 이화원으로 갈수 있었다.

    이는 부의가 처음으로 베이징성의 성문을 나간 것으로 된다.

    부의 일행은 동궁문을 통해 이화원에 진입하였다.

    부의를 모신 사람은 그의 영국 교사 쫭스둔이었다.

    바로 그의 제의로 부의의 첫 번째 이화원행이 앞당겨지게 되었다.

    이번 걸음의 두 번째 날, 쫭스둔은 이화원의 새로운 총관에 임명되었다.

    원내의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와 가는 곳마다의 정교한 건축들은 부의에게 더 없는 놀라움과 기쁨을 주었다.

    쫭스둔의 회억에 의하면 황제는 매우 기뻐하였다.

    부의는 처음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농촌마을과 이화원을 보았으며 이화원 본신도 훼손되지 않았었다.

    이는 황제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후에 쫭스둔은 전문적으로 부의를 위해 외지에서 3척의 신식 유람선을 주문하여 만들었다.

    첫 유람선 애리스가 진수되었을 때 원림 내 직원가운데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쫭스둔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그들은 이전에 종래로 이런 배를 보지 못했다.

    천자가 배사공이라는 고되고 힘든 직업을 대체하여 힘들게 노를 젓는 것을 보고는 처음에는 모두 두려워했다.

    하지만 부의를 위해 주문하여 만든 세 번째 유람선이 이화원에 운반해오기도 전에 국세는 돌연적으로 변화하였다.

    1924년 11월 5일, 풍옥상장군은 군대를 데리고 와 부의와 그의 작은 조정을 자금성에서 축출하였다.

    동시에 청나라 황실은 이화원을 잃게 되었다.

    이화원의 모든 건축과 진렬품들은 청나라 황실 사후조사처리위원회에서 봉인하였다.

    하지만 2년 후 일찍 부의에게서 큰 포상을 받았던 당시 수도위수 사령으로 있던 왕화이칭이 뜻밖에 사사로이 이화원을 청나라 황실에 돌려주었다.

    베이징대학의 한 교수는 1925년에 두 딸을 데리고 이화원을 유람한 후 이런 일기를 남겼다.

    5월 15일, 목요일, 날씨가 흐렸다가 개였다가 변덕스러움,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데리고 이화원을 유람함,

    문표는 은화 1원 20전,

    패운전에 들어가 또 표를 끊었는데

    매인당 은화 50전,

    해위원에 들어가 또 표를 끊었는데

    매인당 은화 20전, 이화원지도를 샀는데 한 장에 은화 10전이었다.

    호수에는 배가 있었는데 3원내지 5원이었다.

    그들은 원림에서 어떤 경물을 보았을까?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원림 내에 진열된 것은 모두 치워지고 테이블 위의 꽃병과 나무 의자만 남아 있었는데 먼지가 몇 치 정도 끼었고 문에는 봉인을 붙였는데 오직 건축의 웅장함만 목격할 수 있었다.

    【1924년 위화원 입장권】

    이것이 바로 당년 이화원의 입장권이다.

    모두 3개 연으로 되었는데 표를 팔 때 한 개 연을 남기고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각기 한 개 연씩 받았다.

    이 입장권의 가격은 은화 1원 40전으로 당시 한 포대 40근 밀가루의 시세와 맞먹었다.

    입장권 소득의 3분의 1은 육군 통령관아에 돌아가고 나머지는 청나라 황실 내무부에 귀속되었다.

    입장권을 팔아 이화원을 개방하는 주요목적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작은 조정은 이화원의 지출을 감당할 힘이 없었다.

    자희태후가 죽은 후부터 이화원에서 사용하는 보수비는 매년 원래의 15만 냥의 백은으로부터 5만 냥으로 삭감되었다.

    후에는 이 5만 냥마저 제때에 지불할 수 없었다.

    1921년 30여개의 저목장에서 이화원을 보수하는 공정에 참가하였는데 연명으로 부의에게 공정 체납금 25만 냥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청나라 황실은 최후 절반도 안 되는 채권만 지불하고 급급히 마무리 지었다.

    설사 문표수입을 더하더라도 이화원의 일상적인 비용은 수입이 지출보다 많아 원림의 건축은 날로 황폐해졌다.

    1928년 7월 1일, 이화원을 난징국민정부 내무부가 접수하였다.

    이는 이전의 황가원림이 정식으로 국가공원으로 된 것을 표지한다.

    이때의 이화원은 심하게 파손된 지 오래되었고 많은 건축물은 세주었다.

    【함허당】

    낙수당 앞뜰 등 17개의 건축은 갑등급으로 세주고

    【지춘당】【옥난당】

    지춘당 등 12개의 건축은 을등급으로 세주었으며

    【낙농헌】【영수재】

    악농헌, 영수재, 평안실 등은 병등급으로 세주었다.

    【이화원•화중유】

    화중유는 만수산 서쪽 산중턱에 자리 잡았는데 점경과 관경 기능을 모두 갖춘 건축이다.

    정면은 2층짜리 누락인데 양 켠에 각기 1층이 있다. 동쪽의 것은 애산동이라고 하고 서쪽의 것은 제츄라 하고 뒤쪽에는 징훈각이 있다. 각 건축물 간에는 산에 오르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누각에서 경치를 굽어보면 곤명호 수면은 아득하고 연파가 자욱한데 먼 곳에서 하늘과 물이 맞닿고 창망한 일색이다.

    호면에서 만수산을 바라보면 청산의 푸른 송백과 서로 가리면서 어울려 돋보이는 화중유는 때로는 눈부시게 화려하고 때로는 몽롱하다.

    사람이 경물 속에 있으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같다.

    1932년, 화중유는 한 구 군벌의 아들 예도걸이 세를 맡았다. 건축이 몹시 파손되었기에 예도걸은 부득불 자기의 호주머니를 털어 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화원•청화헌】

    배운전 서쪽의 청화헌은 원세개의 큰아들 원극정이 장기적으로 세를 맡았다.

    【청의원•나한당】

    여기는 원래 건륭시기 청의원 대보은연수사 나당의 유적지이다.

    자희태후가 이화원을 다시 수리할 때 여기에 청화헌을 개축하였다.

    원내엔 한 개 못이 있는데 8각 연꽃 모양을 띠었다.

    못 중의 물을 8공덕수라고 하는데 불경에서 말한 8가지 기능을 지닌 정수이다.

    원극정은 여기에서 십몇 년을 살았는데 해방전야에 집세를 물지 못해 청화헌을 떠나게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남호도도 세를 주어 식당을 꾸렸다.

    불향각마저 이 식당의 지점으로 되었다.

    의하원에서는 상인을 모셔다 어업회사를 꾸렸는데 고기를 잡아 팔았다.

    곤명호는 어장으로 변해버렸다.

    이화원의 일부 건물 앞에서는 이러한 큰 동항아리를 볼 수 있다.

    당년 항아리에 깨끗한 물을 가득 담아두었는데 소방하는 데 사용되었다.

    1945년 7월 15일 깊은 밤, 이화원 배운전 앞에서 한 가지 긴급한 공정이 한창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직원들이 3쌍의 항아리 표면의 도금을 자세하게 긁어내고 있었다.

    1937년 이후, 이화원은 일본 침략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바로 이런 항아리를 일본에 가져다가 무기를 제조하려 하였다.

    직원들은 항아리에서 긁어낸 금 부스러기를 녹여서 3개의 크고 작은 금괴를 만들었는데 무게는 2냥 4전이었다.

    금괴는 비밀리에 베이징 시장에게 보내져 국고에 보관되었다.

    20일후, 원내의 6개 항아리를 일본군이 가져갔다.

    동시에 가져간 것들로는 동 책상 한 개, 동 향로 4개, 동화로19개였다.

    하지만 이러한 물건들은 탠진에 도착한 후 바다로 나가기도 전에 일본은 투항하였다. 이런 문물들은 다시 이화원에 돌아오게 되었다.

    항일 전쟁이 결속되어 3년 후, 이화원은 또다시 전쟁의 위험에 직면하였다.

    1948년 12월, 국민당 부작의의 부대가 이화원에 진주하였다.

    원내의 뒷산과 북궁문 밖에 전호를 파고 토치카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는 해방군과 생사를 걸고 마지막 승부를 겨루러 준비하였다.

    12월 12일, 해방군 선두부대가 안화교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화원 북궁문까지는 몇 백 미터도 되지 않았는데 쌍방은 유효사격권내에 있었다.

    하지만 진공은 시종 개시되지 않았다.

    【전쟁구역문물보존목록】

    원래는 중공중앙은 건축전문가 양사성선생에게 위탁하여 베이징성내 중점문물고적의 분포정황을 작성하게 하였다.

    고적을 보호할 데 관한 명령이 이미 해방군의 각급 지휘관들에게 전달되었다.

    해방군 부대는 명령을 받고 석경산을 에돌아 시가지에 진입하였다.

    원내에 하룻밤 주둔해있던 국민당 군대는 싸우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화원은 결국 전화를 피면하게 되었다.

    경복각은 이화원 앞산 동부에 위치해있다.

    청의원 시기 여기는 우담화와 비슷한 2층 누각이 있었는데 우담화각이라고 불렀다.

    1860년 우담화각은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소각되었다.

    자희태후는 이화원을 수리할 때 경복각으로 개축하였다.

    1949년 1월 29일, 해방군과 베이징수비군 부작의는 연합으로 사무기구를 꾸렸는데 바로 여기에서 성립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일련의 베이징을 인계인수하는 실시 방법이 여기에서 토의 결정되었다.

    이틀 후 베이징이 평화적으로 해방되었다.

    당시 쌍방의 연합사무기구의 주임, 해방군의 대표 엽검영은 임시 경복궁과 가까운 익수당에 거주하였다.

    익수당에는 정밀하고 아름다운 수화문이 있었는데 정전과 동서 양측의 곁채는 긴 복도로 연결되었다.

    광서 년간에 건축되었는데 이화원에 전문 제공하는 약국이었다.

    1949년 3월 25일 오전, 익수당에 한 패의 특수한 손님들이 왔다.

    그들은 서백파로부터 베이징에 온 중공중앙과 해방군 총부의 책임자들은 모택동, 주덕, 류소기, 주은래, 임필시 등 사람들이었다.

    익수당에서 조금 휴식한 후 그날 오후 여기에서 서교비행장에 가서 중공중앙이 베이징에 입성한 열병의식을 거행하였다.

    일찍 1948년 말, 이화원은 베이징에 앞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당시의 이화원의 건축은 심하게 파손되고 초목은 황폐해졌다.

    해방군이 이화원을 접수할 때 원내의 잔고는 겨우 구 화폐 2027원 30전 4푼이 남아있었는데 인민폐로 환산하면 이십 전에 불과하였다.

    1949년 초, 화북인민정부는 각계 전문가를 조직하여 이화원에 대해 한차례 철저한 측량조사를 진행하였다.

    이어서 응급성적인 수리복원공사가 점차적으로 전개되었다.

    국가의 사업이 방금 시작되고 재정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각급 지방정부에서는 이화원의 수리복원공사를 위해 기꺼이 돈주머니를 풀었다.

    불향각은 만수산 앞산 건축의 구도중심이며 경물을 볼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장소이다.

    불향각에 서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중앙건축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넓은 곤명호에는 17공교와 구불구불한 서제가 가로놓여 있다.

    원경은 끝없는 전야이다. 서쪽을 향해 바라보면 옥천산과 서산의 원경과 원내의 경물이 한데 어울려 의경이 심원하다.

    이런 경관은

    중국 고전원림예술의 경전 적 작품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새 중국이 성립된 초기

    불향각은 이미 유람객들에게 개방할 수 없었다.

    1953년, 불향각은 청나라 말기 이래

    처음으로 전면적인 보수에 들어갔다.

    6센티미터나 기울어진 나무로 된 건물을 새롭게 바로잡고 누각 꼭대기와 지붕 전체를 다시 수리하고 유리기와를 보충하고 채색 금용과 옥새를 다시 채색그림으로 그렸으며 큰 순금도 붙였다.

    이번 공정이 준공된 후

    불향각은 30년간 비가 새지 않았다.

    1976년 탕산 대지진 때 불향각은 처마널판지가 떨어진 외에 건축은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았다.

    【덕화원】【청리관】【함허당】【배운전】

    불향각을 손질한 후 덕화원, 청리관, 함허당, 배운전 등 주요건축도 육속 보수하였다.

    1958년부터 이화원에서는 베이징의 각 예술단체를 요청하여 덕화원 희곡무대에서 종목을 공연하였다.

    1908년 자희태후가 사망한 후 옹근 50십년이 지나서야 여기에서 다시 북소리가 울리게 되었다.

    옹근 길이가 7백 28미터에 달하는 긴 복도는 이화원의 표지 성 건축의 하나이다. 세계상에서 제일 긴 화랑으로 우미한 조형과 복도우의 1만 4천여 폭에 달하는 채색그림으로 세상에 이름나 있다.

    새 중국이 성립된 초기, 긴 복도의 채색그림은 이미 50년간 보수하지 않아 화면의 채색물감이 탈락되고 모호하였다.

    1959년, 긴 복도를 수리하는 대공정이 가동되였다.

    이는 청나라 말기 이래 처음으로 되는 전면적인 보수공정이었다.

    긴 복도는 러시아식 채색화의 공예를 사용하였기에 주요하게 공예가들이 말과 행동으로 가르쳤는데 내용제재는 고정되지 않고 수의성이 강하고 보존하기 힘들었다.

    원래의 채색그림도안은 참고자료가 결핍하였기에 구경 어떻게 보수할지가 난제로 나섰다.

    당시 이화원의 한 일군이 불현듯 그가 항저우에 출장 갔을 때 항저우유람도를 지니고 돌아온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여 이 유람도의 서호풍경을 긴 복도에 그려 넣게 되었다.

    여러 곳에서 몰려온 공예사들이 크게 솜씨를 펼쳤다.

    많은 모호한 채색그림들이 모사되어 새롭게 재탄생되었다.

    반세기 만에 긴 복도의 풍채가 재현되었다.

    후에 긴 복도는 몇 번의 보수를 거쳐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채색그림으로 되었는데 대부분은 1978년에 그린 것이다.

    1990년 12월, 얼어붙은 곤명호는 아주 흥성흥성하였다.

    규모가 매우 큰 공정이 전면적으로 가동된 것이다.

    건륭시기로부터 이 곤명호는 원림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었다.

    2백 40년의 세월이 흘러 곤명호는 진흙이 충적되어 물의 양이 계속하여 감소하였다.

    1982년 2월 8일에는 전부의 호수가 말라 밑바닥까지 하였다.

    1990년 11월 베이징시정부에서는 겨울을 이용하여 일차성적으로 곤명호 밑바닥에 충적된 진흙을 청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곤명호 역사상 처음으로 철저하게 진흙을 청리하는 공정이었다.

    기계로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인공으로 곤명호의 얼음을 까내야 했다.

    20일간, 베이징 시 각계 약 18만 명의 보통시민들이 이 공정에 참가하였는데 전부가 의무노동이었다.

    진흙을 가셔내는 공정은 2개월이 걸렸는데 가셔낸 면적은 1백 20만 평방미터였다. 옹근 호수 밑바닥을 평균 57센티미터를 파냈다.

    1991년 3월 10일, 곤명호는 다시 갑문을 열어 물을 방출했다.

    진흙을 청리한 후의 곤명호는 청의원 시기의 호수가 거울처럼 맑고 푸른 물결이 아득하게 펼쳐지는 경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곤명호 위의 구불구불한 서제는 청의원 시기 항저우 서호의 소제를 본받아 건설한 것이다.

    이화원 서쪽구역을 다스리는 공정이 가동됨에 따라 서제 일대의 강남의 수려한 풍경이 1백 30년 후 다시 생기를 얻게 되었다.

    1991년, 곤명호 서남부 한 구간의 넓고 긴 제방 위에는 건축물들이 땅을 차고 일어섰는데 3채의 2층 작은 건물로 조성되었고 경명루라고 불렀다.

    경명루는 청의원 시기에 건설되기 시작하였는데 곤명호 서제에서 제일 큰 건축이다.

    원대 화가 조맹부의 유명한 그림 중의 경치를 본떠 건설한 것이다.

    1860년 경명루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소각되었다. 자희태후는 이화원을 보수할 때 경명루는 다시 건설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한 세기 이후 원 유적지에 건설된 경명루에서 유명한 봄과 경명루의 경치가 이화원에 다시 나타나게 하였다.

    일반 유람객들은 대체로 눈앞의 경치와 이화원을 연결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이는 바로 이화원 만수산 뒷산의 경치이다.

    뒷산과 앞산의 건축풍격은 같지 않고 식물도 다소 구별이 있다.

    앞산은 측백나무가 위주이고 사이사이에 소나무를 심었다.

    푸르른 소나무와 측백나무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각들이 서로 어울려 빛을 뿌림으로써 황가원림의 광활한 기세를 남김없이 표현했다.

    뒷산은 소나무가 위주이고 측백나무를 보조로 하고 사이사이에 단풍나무, 홰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를 심었다.

    수림 속 나무 아래에는 색채가 다양한 관목화초들이 널려있다.

    앞산에 비해 뒷산은 자연 산야의 경치에 근접하고 여기의 정교하고 완약한 건축풍격과 잘 어울려 정취를 자아낸다.

    일조가 다르기에 뒷산은 앞산에 비해 평균 기온이 1도 가량 낮다.

    특히 여름에 뒷산은 시원하고 습윤하여 사람들에게 수려하고 그윽하고 조용하고 안온한 감수를 준다.

    뒷산의 일부 지방에서는 지금도 청의원 시기의 많은 유적지를 볼 수 있는데 이런 건축들은 모두 1860년에 있은 큰불에 소각된 것이다.

    자희태후 시기 경비가 모자랐기에 뒷산의 모든 건축을 다시 건설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20세기 80년대 이후 뒷산의 건설은 이화원의 경관을 회복하는 중점 공정의 하나로 되었다.

    북문으로 이화원에 진입하여 낮은 데로부터 올라가면 걸음마다 경치가 바뀐다.

    마지막엔 눈앞이 활짝 트이는데 한 개 조의 높고 크고 아름다운 서장식 불교건축이 눈앞에 펼쳐져 마치 몸이 불국 선경에 잠겨있는 듯하다.

    이 한 개 조의 건축을 4대 부주라 하는데 뒷산 건축의 핵심이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소각된 후의 1백년간 여기는 줄곧 폐허였다.

    지난세기 80년대에 4대 부주가 다시 보수되었다.

    1990년 가을, 조용했던 만수산 뒷산이 각별히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일찍 백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시장거리가 세인의 앞에 재현되었다.

    시장거리는 속칭 수저우거리라고 한다.

    건륭황제가 강남에 간 후 소저우의 산당거리를 본떠 건설한 것이다.

    때문에 한 갈래 강 양안의 구조는 강남의 특색을 많이 구비하였다.

    이번에 다시 건설됨에 따라 수저우 거리는 청의원 시기의 경관을 전면적으로 회복하였다.

    유일하게 다른 것이라면 당년의 수저우 거리는 건륭황제가 황태후에게 드리는 선물로 황태후가 베이징을 떠나지 않고서도 강남을 유람하는 즐거움을 향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오늘의 수저우거리는 세계각지에서 온 유람객들이 역사를 추억하고 특색이 있는 음식을 맛 볼 수 있는 곳으로 되었다.

    유람객들은 직접 당년의 황제와 황태후가 원림을 유람할 때의 감수를 체험할 수도 있다.

    이화원 서북쪽 귀퉁이의 이 유람구역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농후한 자연의 숨결과 향촌의 산야의 분위기를 감수할 수 있다.

    이 별다른 풍모의 풍경구역을 경직도라 한다.

    이것은 일찍 건륭시기 청의원의 중요한 조성부분이었다.

    【경직도•강희시기】

    “경직도”는 원래 그림의 이름으로 남송 때에 기원하였다.

    그림의 내용은 농촌에서 경작하고 길쌈을 하는 생활을 위주로 하는데 역대 황제들이농업과 양잠업을 권장하는 중요한 형식이었다.

    【경직도•옹정시기】

    청나라 강희, 옹정과 건륭 시기 모두 경직도를 제작하였다.

    【경직도•건륭시기】

    건륭은 “경직도”의 그림을 모본으로 청의원에 경직도풍경구역을 건설하였다.

    경직도풍경구역은 건륭 15년으로부터 시작하여 건설하였다.

    이듬해에 청나라 내무부의 방직염색국이 지안문으로부터 여기에 이사하였다. 동시에 원명원의 13세대의 양잠농가들도 이사해와 청의원에서의 경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매년 9월, 방직염색국은 여기에서 누에신묘에서 누에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논밭에서 농사하고 누에를 양식하는 것이 주요경관의 경직도로 농업과 양잠을 중시하는 치국의 근본을 상징한다.

    1860년, 경직도가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소각되었다.

    자희태후는 원림을 다시 건설할 때 담장을 만들었다.

    【민국초기경직도유적지사진】

    경직도의 대부분은 담장 밖에 획분 되었기에 경직도의 건축은 이미 완전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2003년부터 경직도 원유의 건축이 육속 다시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백 44년간 황폐해진 후 경직도의 경관이 다시 세인들의 앞에 재현되었다.

    경직도 경관의 복원은 이화원 서북구역이 이미청의원 시기의 면모를 기본적으로 회복된 것을 표지한다.

    청의원으로부터 이화원에 이르기까지 이 오랜 원림에는 많은 이야기와 전설이 세월과 함께 유전되고 있다.

    만수산을 허물고 누각을 건설한 수수께끼는 후세사람들이 풀도록 남겨져있다.

    하지만 불향각은 새로운 전기를 계속 쓰고 있다.

    1989년 국경절 전야, 다시 큰 보수공사를 마친 후의 불향각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여 각지의 유람객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옹근 새 전당에 미봉할 수 없는 유감이 남아있었다.

    청의원 시기 불향각에는 하나의 천수관음동상을 모시고 있었는데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파손되었다.

    이화원을 건설할 때 다시 세운 니타이 불상도 이후의 동란 중에서 파손됨으로써 다년래 일층의 불상은 줄곧 자리가 비어 있었다.

    바로 이때 북경 서성구역의 한 사당의 옛터의 이중벽에서 하나의 커다란 불상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기재중의 불향각의 관음상과 매우 흡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무게가 만근에 달하는 큰 불상이 마침내 1989년 9월 29일 오후에 불향각 1층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내역이 신비한 큰 불상은 전부 동으로 제작되었는데 높이가 5미터이고 12개 면 24개의 팔로 되었는데 감정에 따르면 그의 역사는 이미 4백년이 되는데 이 원림의 역사보다 훨씬 앞섰다.

    사람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동불상의 모양새나 자태 그리고 대소크기가 불향각과 진주가 한데 꿰이고 옥이 한데 모인 것처럼 어울린 것이다.

    마치도 전문적으로 주문해서 만든 것과 똑같았다.

    유일하게 옥에 티라면 불교의 의궤에 따르면 관음불상의 꼭대기에 반드시 하나의 작은 불상이 있어야 한다.

    이름은 화불이라 한다.

    하지만 이 불상의 화불은 이미 잃어져 밑받침대만 남아있다.

    신기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큰 불상이 정착한 후 누군가 이화원의 창고에 하나의 작은 동불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유람객이 곤명호에서 헤엄을 칠 때 건져 올린 것이다.

    사람들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작은 불상을 큰 불상의 머리꼭대기에 올려놓았는데 결과 두 불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았다.

    이로써 크고 작은 두 개의 불상과 불향각의 기이한 인연은 이화원이 태평 성세할 조짐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오랜 뽕나무는 2백 40년이라는 연륜을 갖고 있다.

    이화원에서 풍진세월을 겪으면서 생존한 고목은 아직도 많다.

    그들은 원림생명의 연속이며 이 원림 성쇄 변천을 제일 권위 있는 견증자이기도 하다.

    1998년, 이화원은 유네스코문화유산 명록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위원회에서는 이화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베이징의 이화원은 중국풍경원림조원예술의 하나의 걸출한 표현이다.

    인조경관과 대자연을 조화롭게 일체로 융합하였다.

    이화원은 중국의 원림을 만드는 사상과 실천의 집중적 체현이며 이 사상과 실천은 옹근 동방원림예술문화형식의 발전에 관건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화원을 대표로 하는 중국 황가원림은 세계 몇 개 큰 문명 중의 하나임을 유력하게 상징한다.

    만수산 앞산 중부에는 만수산 곤명호 석갈이 놓여있다.

    석갈은 1751년에 건립되었는데 건륭황제가 청의원을 건설한 기념비이다.

    2000년 또 하나의 한백옥 석갈이 동궁문 내에 일떠섰다.

    이는 이화원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된 표지이다.

    두 개의 석갈은 지척에 놓여 있지만 2백 49년이라는 세월의 풍파를 뛰어 넘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문화와 문명의 정수는 한 핏줄로 이어져 내려오고 항상 생기가 넘쳤으며 시공을 넘나들며 계속 이어지며 끊이지 않았다.

    번역: 유대식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4-04-14 11: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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