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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고궁 2회 - 성세의 용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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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CCTV.com한국어방송]세계를 진감하는 전쟁으로 모든 게 결속되었다. 정권 교체가 한창 진행중이다.

    1644년 음력 8월, 호호탕탕한 수행 대오의 배동아래 6살된 남자애와 그의 어머니가 고향 성징에서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 남자애의 이름은 복림인데 바로 청나라의 순치 황제이다. 이번의 목적지는 베이징에 있는 새 집인 자금성이다.

    6살된 순치 황제에게 전에 한번도 본 적 없는 높고 큰 성문은 신기하고도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이는 자금성에서 가장 큰 문으로 높이가 37.95미터이다.

    중국의 음양학설에 따라 정북은 자라 하고 정남은 오라 한다. 때문에 자금성 중축선 남쪽 끝에 위치한 이 성문을 ‘오문’이라 부른다.

    오문을 지나니 자금성의 정경이 순치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바로 그들의 새 집이다. 이 궁전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들이 중국의 새 통치자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짙은 붉은 색의 담과 황금색의 유리기와는 궁전에서 가장 이목을 집중시키는 특점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붉은색과 금색으로 자금성은 주변 건축과 눈에 띄게 잘 구분된다.

    내정 전조 전조라 부른다.

    자금성의 건축은 전과 후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 부분은 조정의 정무를 처리하고 중대한 예의행사를 진행하는 곳으로 전조라 불린다.

    후 부분은 황제가 일상정무를 처리하고 후궁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내정이라 불린다.

    진훙쿠이(고궁박물원 부관장):

    자금성의 전반 배치는 이렇습니다.

    종심으로 된 여러 개의 중축선에 따라 이 건축물을 배치했고 건축물은 또 정원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정원마다 여러 개의 건축물이 집중되어 있구요.

    건축물은 또 서로 간에 주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 중간 위치에 있는 것과 배합되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이런 건축 수단을 통해 봉건사회, 봉건예의제도가 드러내는 등급과 질서를 보여주었습니다.

    해설:

    옥황대제의 자위궁에 총 1만개의 방이 있고 인간세상의 자금성에는9999개 반의 궁전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사실상, 5백여년 동안 자금성은 줄곧 변화가 잇따랐다.

    1973년 고공 전문가의 조사결과 자금성에 현존하는 궁전이 8704개가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부 사람들은 그해 순치 황제가 처음 자금성을 봤을 때는 그리 완벽하게 건축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주장한다.

    순치 황제보다 몇달 일찍 베이징에 들어온 섭정왕 다이곤이 순치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이자성이 궁전에 불을 지른 후 도망쳤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리셰핑(고궁박물원 부연구원):

    이자성이 불은 지른 건 확실합니다.

    전반 자금성이 어느 정도로 파괴되었는지에 대해 청나라 사람들이 정확하게 얘기했지요.

    건륭시기 수정한 ‘일하구문고’에서는 자금성 궁전은 앞 조대가 남긴 것을 기초로 복구했다고 적었습니다.

    즉 내가 자금성을 수건한 것은 명나라 건축의 기초 위에서 진행했다는 뜻입니다.이는 또 전해지는 것처럼 자금성 궁전이 이자성에 의해 대규모로 파손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하지요.

    해설:

    ‘청실록’에는 6살 순치 황제가 황극문 즉 현재의 태화문에서 보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치 2년, 중축선 위의 궁전이 전부 복구되고 새롭게 명명되었다.

    이는 정권교체가 건축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황극전은 태화전으로, 중극전은 중화전으로, 건극전은 보화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때 불안정한 새 정권에 있어 화란 단어에는 그들이 천하의 평화와 군민이 화목한 앞날을 지향하는 가장 절박한 염원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자금성 편액이 만족어로도 표기되기 시작했다.

    순치 황제는 그가 바라던 평화성세를 맞이하지도 못한 채 24살에 인간세상을 떠났다. 이 해가 1661년이다.

    18년 후의 추운 겨울날 밤이다. 태화전 서쪽의 어선방에 갑자기 큰 불이 났다.

    큰 불이 그대로 번졌으며 2시간 만에 태화전에까지 불길이 미쳤다.

    며칠 뒤, 이번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인 여섯 환관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후부터 태화전은 장장 18년이나 줄곧 폐허 상태였다.

    그간 젊은 강희 황제는 온전치 못한 자금성에서 여러 곳의 원정을 지휘하고 통치를 안정시켰다.

    16년간, 그는 선후로 오삼계를 위수로 한 삼반의 반란을 평정하고 타이완을 수복했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를 물리치고 청왕조가 대외적으로 유일한 평등조약인 ‘중러 네르친스크 조약’도 체결했다.

    강희 34년까지 천하는 태평성세를 누렸다. 이 때가 되어서야 강희 황제는 다시 태화전을 재건할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이번 복구에서 큰 어려움에 부딪쳤다.

    태화전이 명나라 천기 연간에 재건되어서부터 이미 69년이란 시간이 흘러 태화전의 정확한 건축 비율과 치수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독서를 즐겼던 강희 황제가 친히 서적에서 찾아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실망만 남겨줬다.

    양구로 하여 이번 일이 큰 전환을 맞았다.

    그때 이미 70세를 넘은 양구가 명나라 숭진 연간 공부에 들어가서부터 그곳에서 줄곧 40여년간 일했다.

    ‘양구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때 양구가 10대 1의 비율로 태화전의 나무 모델을 만들었고 이 모델 부품을 확대 제작하여 태화전의 구조를 건설했다. 신기하게도 확대해 제작한 나무 부품이 꼭 들어맞았고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그나마 행운인 것은 강희 34년에 태화전 복구에 사용했던 모든 재료 및 수치가 ‘태화전기사’란 책에 기재되었으며 이는 태화전 복구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유일한 서적이다.

    현재 곧 시작 될 태화전 대규모 복구에 이 책은 여전히 중요한 참고적 가치가 있다.

    강희 36년, 태화전이 낙성되자 성대한 낙성식이 진행되었다.

    한 궁전의 축제이자 새로운 성세가 펼쳐질 시작이라는 것도 알려준다.

    이곳이 바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태화전이다.

    8여 미터 높이의 한백옥 세 계단 위에 자리잡은 태화전은 자금성의 핵심이자 자금성 전반 건축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곳이다.

    전반 설계는 지고지상한 황권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에 태화전은 베이징성에서 가장 높은 건축이었다.

    정원에서 정척에 이르기까지의 높이가 36.57미터로 12층짜리 층집의 높이와 상당하다.

    태화전은 자금성에서 가장 큰 건축이기도 하다.

    면적이 2381제곱미터로 축구장 절반 만큼이나 된다. 길이와 너비의 비율도 9대 5로 구오지존을 대표한다.

    태화전은 바로 뒤쪽에 있는 중화전, 보화전과 전조의 주체를 이루고 있는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를 3대 전이라 부른다.

    자금성 건축물의 여러 곳이 숫자 9와 연관이 있는데 9가 가장 크고 지존의 함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문 위에 가로 9줄, 세로 9줄 문정이 박혀 있으며 처마 위에는 9마리의 주수가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숫자인 9만으로도 태화전의 존귀함을 다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붕 위에 10개의 주수를 장식했다.

    하나 더 많은 것을 행십이라 불렀는데 중국 모든 고대 건축 가운데서도 유일한 것이다.

    태화전은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큰 리그닌 구조 건축물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궁전으로 불리지만 반면 배치는 아주 간단하다.

    기대의 뒷받침 아래, 황제의 보좌가 유일한 주인공이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황권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태화전에는 총 72개의 큰 기둥이 있다.

    그중 보좌를 둘러 싼 6개 기둥에는 황금이 장식되어 있고 기둥마다 거룡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황권의 상징이다.

    이 6개의 금 기둥을 따라 위로 올려다 보면 천화판 위에 한 마리의 판룡이 그려져 있다.

    판룡 입에 거꾸로 수직되게 드리워진 구슬이 있는데 이를 ‘헌원경’이라 부른다.

    강희 황제는 이번에 태화전을 새롭게 재건하면서 본래 있던 아홉 칸의 구조를 열한 칸으로 바꿨다. 이번 재건에서 가장 실용적인 개조라 말할 수 있다.

    저우쑤친(고궁박물원 고건부 부주임):

    강희 34년, 태화전을 재건할 때 방화요소를 고려해 리그닌 구조의 사랑을 벽돌담으로, 태화전 양켠의 회랑을 협실로 고쳐 지금 보이는 수평거리가 열한 칸의 구조를 이루었습니다.

    사실상 수평거리가 아홉 칸인 주위랑의 구조는 바꾸지 않았습니다.

    해설:

    2004년 6월, 고궁을 대거 복구하기 전의 답사가 태화전 지붕 내부에까지 진행되고 있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촬영을 시작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리그닌 건축의 양가(기둥과 보)이다.

    대들보에 그린 채색화는 강희 34년 재건할 때 그린 것으로 채색화 가운데서 최고 등급인 화새 채색화이며 현재까지 3백 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이곳에서 신비한 물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태화전 꼭대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는 조정의 바로 윗쪽에 있다.

    이것이 바로 옹정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놓은 부판이다.

    우리는 제1 역사문서관에 수장된 황실 문서에서 이런 한 구절의 내용을 보았다.

    옹정 9년, 8월 12일, 옹정 황제가 명을 내려 3개의 부판을 각각 안심전, 태화전, 건청궁에 놓게 했다.

    리궈룽(제1역사문서관 편연부 주임):

    고대 건축 풍수학에서 부판을 놓은 것이 가장 가장 중요시했습니다.

    집안의 안녕을 지켜주고 악운을 막아내며 평안을 보우하기 위해서였지요.

    옹정 황제가 놓도록 한 이 몇 개의 부판에는 전통적인 도교 팔괘도 외에도 장전불교의 주문까지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는 여러 교파가 나를 위해 서비스하고 그의 평안을 보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하지요.

    해설:

    옹정 황제가 부판을 놓은 것은 태화전, 건청궁과 양심전 이 세 궁전이 자금성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는 점을 더욱 명확히 했다.

    그리고 태화전을 제외하고 기타 두 궁전은 모두 황실의 내정에 있었다.

    전조와 비교할 때 자금성 후 반부를 통합적으로 내정이라 부른다.

    황제, 황후가 거주하는 후삼궁, 비자들이 거주하는 동서 육궁과 황자들이 생활하는 건동서 오소가 포함된다.

    이로부터 자금성의 건축이  빠른 단계로부터 완만한  단계에 들어섰다.

    건청궁과 곤녕궁, 교태전을 합쳐 후삼궁이라 부른다.

    건청궁이 옹정 황제 이전에는 줄곧 황제의 침궁이었다.

    모두 황제가 사용하는 궁전이지만 전조의 태화전 보다 11미터 낮았고 면적도 천여  제곱미터나 적었기에 그 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명나라 때 건청궁에는 후난각 아홉 칸이 있었는데 상하 두 층으로 나뉘었다.

    오늘의 복식 건축물과 유사한데 상하에 총 27개 침대가 배치되어 있어 황제는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

    청나라 때, 동서 난각이 서방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때 곤녕궁은 황후의 침궁이었다.

    청나라 때 궁전 실내의 장식을 크게 바꿨는데 이로 중축선에서 만족 특색이 가장 짙은 궁전으로 되었다.

    실내가 서, 북, 남 세 면과 통했으며 모두 화갱이 있었다.

    서대갱은 조제 신위를 모시고 북갱은 사제 신위를 모시며 동북각은 제사를 올릴 때 고기를 삼는 데 이용하는 주방이었다.

    이같은 배치는 만족 민간의 ‘호주머니방’, ‘만자갱’의 거주 풍속에서 온 것이다.

    건녕궁 동난각에 걸린 건녕궁 명문에서 건녕궁의 배치가 관내로 들어오기 전 선양 고궁에서 황후가 거주하던 청녕궁을 그대로 본딴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후궁에는 황후를 제외하고 이 왕조 황제의 빈비들이 많았다.

    그들은 후삼궁 양켠의 궁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궁전을 통털어 동서 육궁이라 불렀다.

    왕즈린(고궁박물원 부연구원):

    동서 육궁은 ‘주례’의 육침 육궁의 제도에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라 때부터 형성된 ‘주역’ 음양 철학사상을 더 많이 융합시켰는데요.

    궁전의 건축배치를 평면으로부터 볼 때 곤괘의 괘상으로 음을 상징합니다.

    이곳에는 비자들이 살고 있는데요.

    기능은 궁전의 명명으로부터 반영됩니다.

    예를 들어 승건궁이라 명명함은 여기에 거주하는 비자는 반드시 황제에게 순종하고 따라야 했습니다.

    때문에 동서 육궁의 건축은 삼강오상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죠.

    특히 남편이 아내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윤리 도덕사상을 강조했습니다.

    해설:

    동서 육궁의 건축구조는 후삼궁보다 훨씬 낮았는데 이는 이곳에 거주하는 빈비의 종속지위를 설명한다.

    이것은 옹정 황제의 명에 따라 그린 미인도이다.

    황제마다 황가의 대가 이어지고 자손이 번창함으로써 왕조가 흥성하고 강산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1856년,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한 여자의 운명이 바뀌었다.

    그 여인이 바로 중국을 48년간 통치한 자희 태후이다.

    저수궁은 그녀가 갓 입궁했을 때 거주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본 내부 장식은 그가 50세 생일에 63만 냥 백은을 들여 새롭게 보수하고 장식한 것이다.

    난화, 중국 옛 사람들은 왕의 향을 가지고 있고 남자애를 출산할 수 있는 상징이라고 했다.

    난화와 수석이 결합된 도안은 남자애를 낳고 장수한다는 뜻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저수궁의 칸막이에 이런 그림을 대량 운용했다.

    우연이었는지 자희 태후가 막 궁에 들어왔을 때 난귀인으로 봉해졌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훗날의 동치 황제를 출산했다.

    어머니는 아들에 의해 귀해진다고, 권세가 혁혁해짐에 따라 그녀의 침궁 장식은 갈 수록 사치스러워졌다.

    저수궁의 정원 배치에서 용의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동서 육궁 가운데서 유일한 예이다.

    내정 가운데 있는 양심전이 옹정 황제 전까지는 일반적인 궁전에 불과했다.

    옹정 황제가 보위에 오른 후 관례에 따라 건청궁에서 살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강희 황제가 건청궁에서 60여 년을 거주했기에 그곳에서 거주한다는게 정말 잔혹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월화문 밖에 있는 양심전에서 거주하기로 결정하고 궁전 내부를 약간 복구하되 반드시 소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옹정 황제의 이런 결정으로 자금성 내정 국면에 변화가 뒤따랐다.

    이로부터 양심전이 자금성에서 갈 수록 더 중요해졌다.

    양심전의 지위가 갑자기 높아지자 여전히 소박하지는 못했다.

    조합적인 장식이 시작됐던 것이다.

    자금성에서 채광의 좋고 나쁨은 궁전의 지위를 가늠하는 중요한 표징이다.

    채광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심전은 자금성 가운데서 처음으로 유리장식을 한 궁전으로 되었다.

    옹정 원년, 청나라 황궁 내무부 조판처’활계당•목작’에는 ‘10월 초하룻날, 양심전 뒤쪽에 있는 침궁, 천당 북쪽 동서 창문에 유리 두 조각을 장식하라는 어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유리는 아주 희소하고 귀한 물건으로서  전부 해외에서 수입해야만 했다.

    양심전은 전조와 가까웠는데 황제가 휴식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곳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이 궁전의 후 반부는 침실인데 황제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정무를 처리할 때는 용도를 지나면 바로 전조에 도착해 일을 처리할 수 있었기에 효율이 크게 향상되었다.

    옹정 황제 때부터 청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여덟 황제가 양심전을 일상생활과 정무를 처리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각자 다른 생활 흔적을 남겼다.

    한 채의 작은 궁전이 한 왕조 흥망성쇠의 역사를 입증하고 있다.

    등급이 삼엄하고 장중하고 엄숙한 자금성 가운데서 풍격이 독특한 건축물이 생기가 넘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이곳이 바로 녕수궁 화원인데 사람들은 이를 건륭화원이라 부른다.

    여기는 멋스럽고 돌아다니기를 즐기는 건륭 황제가 가장 만족해하는 곳이다.

    이 화원은 자금성의 동북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좁고 긴데다 깊숙이 뻗어 있고 4개 정원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풍경도 각양각색이다.

    건륭 황제가 여섯번 강남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흔상했던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화원에 담았다.

    화원 곳곳에서 건륭 황제가 한족의 전통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중국 고대에 복을 비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를 설상이라 부른다.

    훗날 사람들이 봄을 맞아 산책하는 풍속으로 변화발전되었다.

    문객들도 이때가 되면 서로 모임을 가지곤 하는데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왕희지의 ‘난정서’에 기록되었다.

    맑은 물이 수로를 따라 굽이굽이 흐르고 물 위에 띄운 술잔이 누구 앞에 멈추면 그 사람이 시를 읊어야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벌주를 마시고 승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물이 굽이굽이 흘러 액을 몰아내고 낙을 누리다’는 것이다.

    건륭 황제는 이를 바탕으로 이 정자에 ‘설상정’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화원에 ‘삼우헌’이란 건축물이 있는데 실내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가 장식되어 있다.

    소나무가 강인한 기백을 드러내며 굿굿이 자라고 있고 추운 겨울에도 매화가 피여 있으며 대나무가지는 엉성하지만 굿굿이 자라고 있다.

    이런 것들은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있다하여 세한삼우라고 부른다.

    옛날 문객들은 이 세가지 식물로 인품의 강직함과 고결함을 비유하곤 했다.

    건륭 황제는 삼우헌을 빌어 자신의 품위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청나라 황제가 한족 지식분자들과 사상을 융합시키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건륭화원의 건설은 방대한 건축 공정 가운데의 일부에 불과하다.

    강희시대 이래, 70여년간의 통치를 거쳐 건륭시기에는 중국의 농업경제, 종합국력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건륭 황제가1420년 자금성이 지어져서부터 최대 규모의 개조를 시작했다.

    그가운데서 두 개의 중요한 공정은 정치체제의 개혁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첫번째는 건서이소와 그 주변구역에 대한 개조였다.

    건서이소는 건륭 황제가 황태자 시절의 거처였다.

    그가 왜 이곳을 대규모 개조 했을까?

    황제의 입축제도로부터 알아봐야 한다.

    옹정 황제 이전, 황태자의 선정에는 늘 치열하고도 피 비린내 나는 궁정싸움이 뒤따랐다.

    그래서 옹정 황제는 비밀리에 황태자를 선정하기로 했다.

    그는 황위 계승자를 확정한다는 친필 유서를 썼다.

    한 부는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 뒤에 숨기고 또 한 부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황제가 살아있을 때는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고 있다가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 두 유서를 대조하여 착오가 없을 경우 대외로 발표하고 새로운 군주를 맞이한다.

    건륭 황제는 비밀리에 진행된 황태자 선정제도로 황위에 오른 첫 황제이다.

    그는 단 하루도 황태자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자기가 살던 건서이소의 지위를 한층 높이려고 소로부터 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그 누구도 이곳에 살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황위를 이어받은 정통을 강조하려 했다.

    새로 보수한 후 삼진 정원의 주체 건축물이 새롭게 명명되었으며 각기 종경전, 중화궁과 취운관이라 불렀는데 습관적으로 중화궁이라 총칭한다.

    중화궁이란 이름은 한족 대신 장정옥의 제의에 의해 지어졌다.

    중화는 원고시기 현명한 군주인 ‘순’을 가리키는데 한문화에 정통했던 건륭 황제가 아주 흡족해 하며 건의를 받아들였다.

    건서이소를 개조하고 나서 주변의 몇 개 궁전에 대해서도 개조해 중화궁의 부속조합 시설로 만들었다.

    동쪽의 건서일소를 수방재로 이름을 바꾸고 실내에 작은 무대를 설치했으며 ‘풍아존’이란 이름을 달았다.

    황제가 극을 관람하는데 이용했다.

    그리고 정원 내에 또 따로 큰 무대를 설치했다.

    이는 자금성 내에 가장 먼저 생겨난 무대이다.

    보위에 오른 건륭 황제가 비록 양심전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여전히 편안한 중화궁을 가족, 대신들과 함께 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장전불교를 신앙하는 건륭 황제는 중화궁의 서남부에 자금성에서 가장 중요한 장전불교 건축물인 우화각을 세웠다.

    장전불교는 원나라 때 황궁에 전파되었으며 청나라 때 절정에 이르렀다.

    우화각의 건설은 황제의 예불 수요를 만족시키는 외에 더 중요하게는 종교신앙을 이용해 중국 변강지역의 몽골, 장족 각 부락을 연락함으로써 민족융합을 촉진하고 나라의 통일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자금성 개조에서 정치개혁과 밀접하게 연관된 두번째 중요한 공사가  바로 녕수궁을 수건하는 것이다.

    건륭 황제가 보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위에 올라 61년을 채우지 못한 할아버지 강희 황제를 길하여 집정 60년이 되는 해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 주겠다고 선포했다.

    황위 교체방식의 개변은 자금성에 처음으로 황위에서 물러나는 황제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녕수궁은 바로 건륭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나 말년을 보내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태상황이 머물 궁전으로서의 녕수궁은 급별이 황제의 거처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녕수궁은 전조와 내정으로 구분되며 여러가지 부대시설이 구전히 갖춰져 있다.

    마치 축소해 놓은 자금성과도 같았다.

    녕수궁을 건설하는데130여만 냥이 들었다.

    녕수궁 문 앞의 도금 동사자에만 황금 334냥을 썼다고 한다.

    현재 황위에 올라있는 황제가 물러난 후 사용할 궁전을 짓는 것이 가장 중시받는 공사이었다.

    공부에서는 전국에서 최고의 공예를 장악한 장인을 불러들였다.

    이중에는 뢰씨 성을 가진 건축설계 가문도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린 길이가 무려 5미터도 넘는 자금성 중축선 대청문에서 곤녕궁에 이르는 전반 건축물의 외관 설계도면이다.

    위에는 여러 건축의 명칭과 건축물 사이의 거리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치의 단위까지도 명확히 계산되어 있다.

    강희 연간부터 이 가족은 전후로 2백여년이나 줄곧 황실 건축 설계 일을 해왔다.

    그들의 주최로 건설되고 설계한 작품 가운데서 세계문화유선에 입선된 것만해도 고궁, 의화원, 천단 등이다.

    조손 7대 설계 가문을 ‘양식뢰’가족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고대의 건축설계는 문자 설명, 설계도, 탕양 삼자를 결합시킨 방식을 사용했다.

    이른바 탕양이란 바로 입체적인 설계 모델을 가리킨다.

    이것은 중국 고대 건축 설계에만 특유한 것이다.

    현재 고궁에는 여전히 그때 뢰씨 가문에서 제작한 탕양을 보류하고 있다.

    탕양은 판지, 수숫대와 나무 등으로 붙여 만든 것이다.

    델을 만든 후 작은 다리미로 세밀한 곳까지 다리미질하는 것인데 이를 탕양이라 한다.

    이것은 청나라 말기 뢰씨 가족이 자금성 장춘궁을 위해 설계한 탕양이다.

    여름에는 장춘궁에 큰 천막도 지었다.

    탕양의 관련 부위에 대해서는 모두 구체적인 문자설명과 건축치수가 있다.

    한층한층의 전시를 거쳐 우리는 건축의 내부 구조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때의 탕양은 주로 황제가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황제의 의지가 궁전 건축을 결정하는 최종 의거였기 때문이다.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작은 자금성이라 불리우는 녕수궁이 완공된 후 건륭 황제는 하루도 여기서 살지 않았다.

    그는 왕좌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전히 양심전에 머물면서 1799년 즉 그가 8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정을 통제했다.

    명나라 영락 연간부터 청나라 건륭 연간까지 자금성은 3백 여년의 건설과 재건, 복구를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자금성에서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역사는 계속 이어져 나가고 있다.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4-05-16 09: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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