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솬우먼 (宣武门,선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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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솬우먼(宣武门,Xuānwǔmén,선무문) 소개

 

(1870년경 선무문 옹성 안쪽)

 

선무문(宣武门), 베이징 내성 남쪽 성벽의 서문이다. 원나라때는 순승문(顺承门)이라 불렀다. 명 영락17년에 베이징 남쪽 성벽을 확장공사한 후에도 여전히 순승문이라 불렀다. 정통원년 명정부가 성루를 새로 짓고, 옹성과 전루, 갑루를 추가건축했으며, 정통4년(1439)에 완공했다. 장형(张衡)의 <동경부(东京赋)>중 "무절시선(武节是宣)"에서 무열선양(武烈宣扬)의 뜻을 담아 "선무문"으로 개명했다. 동쪽의 선문과 서로 호응하여 '좌문우무'를 이루었다.

 

 

(청 건륭15년 1750년《京城全圖》중 선무문 부분지도)

 

선무문 성루의 너비는 5칸, 전체너비 32.6미터, 세로길이는 3칸, 전체길이는 23미터, 건축전체의 높이는 33미터다. 옹성의 남북 길이는 83미터, 동서너비는 75미터이고 서쪽벽에 옹성문이 있고 그위에 갑루가 있다. 옹성남벽 성대위에 전루가 세워져 있는데, 전루의 면적은 7칸, 전체 너비 36미터, 세로길이는 21미터, 전체 높이는 30미터다. 

 

 

(1900년경 선무문 성루 석편)

 

선무문 바깥은 채시구 형장(菜市口刑场)으로, 호송차(수레나 마차)의 출입이 잦아, 사람들은 "죽음의 문(死门)"이라 불렀다. 옹성위에서 하루 한차례 정오를 알리는 포가 울리는데, 바로 "선무오포(武午炮)"로 불리우는 처형을 알리는 소리다. 당시 처형장이 선무문 바깥 채시구에 설치되어 있었다. 죄인이 형부의 확정을 받은 후, 선무문을 통과하여 나온후, 채시구에서 죄인을 참수했다. 선무문 성문동굴 천정에 "후회지(后悔迟)" 라구 세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후회하기에는 늦었다라는 뜻이나 실제로

 

(청대 말기 채시구 형장)

채시구는 베이징의 번화가였다. 남방에서 베이징을 올때, 로구교(卢沟桥)를 거쳐,광안문(广安门)을 통과한 후, 다시 베이징 내성으로 들어가려면 이곳을 거쳐야 했다.  채시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을 처형하던 곳이었는데, 특별히 고정설치된 형장은 없었으며, 보통 북쪽길가의 상점 앞에서 감독관의 자리를 마련하면 그만이었다. 송말원초, 송나라 승상  문천상(文天祥)이 결국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아, 최후에는 이곳 채시구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문천상은 처형직전에 "송나라 신하로서 맡은 일들 이제 모두 마쳤다" 라고 유언을 남겼다. 또한 무술육군자중 하나인 담사동(谭嗣同) 역시 이곳에서 "도적을 죽이려했으나, 능력이 없어 죽는구나, 가치있게 죽겠으니 빨리 처형하라" 하고 큰 소리로 호탕한 유언을 남겼다.    

 

(1901년 선무문 동벽과 전루, 옹성 및 성루. 독일인 Alfons Mumm von Schwarzenstein 촬영)

 

(1921년, 선무문 전루 성체위의 대포, 전루 건축은 이미 철거되었다.)


선무문은 청대에 이르러서 기본적인 변화없이 명대의 모습을 유지했다.  민국기간, 1920년 전에 이미 전루와 갑루가 철거되었으며, 옹성은 1930년경에 . 1966년 지하철건설시, 문루와 성벽을 철거하였으며, 호성하 하천은 매립하여 선무문 동서거리가 되었다.

현재 선무문에는 지하철 2호선,  4호선이 지난다.

 

 

(1972년 선무문 동남각, 지하철 역과 선무문 천주교당이 보인다)

 

(1980년 전후 선무문 남쪽거리 모습)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금지 베이징관광국 한글공식사이트     최종수정일: 201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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